<언제나 청춘>

2010. 5. 1. 21:02카톨릭 이야기/영성의 샘물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양승국신부-


<언제나 청춘>


‘깜빡’ 하고 한 이틀, 갓 심은 어린 모종들에게 물주는 것을 까먹었습니다. ‘큰일이다’ 싶어 밭으로 달려가 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강렬한 초여름 태양열에 어린 모종들은 사나흘 굶은 사람들처럼 힘이 하나도 없이 시들시들 말라가고 있었습니다.


미안한 마음에 듬뿍듬뿍 물을 주었습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하면서 한 녀석도 빠지지 않고 골고루 물을 다 주고 나서 잠시 앉아있는데, 정말 특별한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니었습니다. 물이 흙으로 다 스며들기도 전에 말라비틀어졌던 모종들 얼굴 색깔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방긋방긋 웃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고맙다고 인사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고개를 축 늘어트렸던 녀석들이 다시 꼿꼿이 허리를 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하느님이라는 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수를 부여받지 않으면, 우리 역시 모종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은 즉시 말라비틀어집니다. 우리의 나날은 황폐해집니다. 삶이 재미가 하나도 없고 무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과 사랑의 샘에 우리의 뿌리를 두고 있을 때, 우리 삶은 언제나 청춘일 것입니다. 우리의 나이는 언제나 방년 18세일 것입니다.


온천지가 초록빛으로 짙어가는 오월입니다. 주위를 찬찬히 돌아보면, 가던 발길 멈추고 사방을 둘러보면 여기 저기 하느님 생명의 숨결로 가득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라고 간청합니다.


너무나 황당했던 예수님께서는 질책의 분위기가 담긴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하느님의 얼굴을 내 두 눈으로 직접 뵙는 것, 하느님의 음성을 내 귀로 직접 듣는 것, 하느님을 내 두 손으로 직접 만져보는 것...‘지복직관’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가장 간절한 바람일 것입니다.


신앙의 대상인 하느님에 대한 확실한 체험 없이 그분을 믿는다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어렵고 힘든 일이었나 봅니다.


하느님을 체험하고, 그분의 뜻을 파악하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일은 사실 어려운 일입니다. 모든 신학교 정규과정을 다 마쳐도 사실 불가능합니다. 죽기 살기로 머리 싸매고 하느님에 대해 공부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닙니다.


이런 우리의 고민을 해결해주시기 위해 강생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떤 분이신가 정확하게 알려주기 위해 나타나신 하느님의 분신, 하느님의 정확한 모상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사실 우주 전체가 다 하느님 섭리의 손길 아래 맡겨져 있습니다. 세상만사가 그분 품에 안겨져 있습니다. 나를 내려놓고, 욕심을 내려놓고, 그분 품에 푹 잠길 때 하느님은 더욱 우리 가까이 다가오실 것입니다. 그 때 세상 모든 것이 하느님 생명의 숨결 아래 놓여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체험이 부족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너무나 당연한 논리입니다만 세상만사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시지만,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 너무나 우리의 시선이 몰두하고 있기에 하느님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평생토록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동행하시는 엠마오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비록 오늘 뚜렷이 그분을 체험하지 못한다하더라도, 끊임없이 그분을 바라보고, 지속적으로 그분을 향하며, 항상 감사와 찬미의 송가를 불러드릴 때, 하느님께서는 소리 없이 우리 옆으로 다가와 않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