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 김영하] 주말산책, 동작대교남단 ~ 서래섬

2010. 7. 14. 11:12사진과 함께 좋은글과 시/좋은글과 시

 

 

 

 

 

 

 

 

 

 

 

 

 

 

 

 

 

 

 

 

 

 

 

 

 

 

 

 

 

 

 

 

 

 

 

 

 

 

 

 

 

 

 

 

 

 

 

 

 

 

 

 

 

 

 

 

 

 

 

손 - 김영하


 

  자신에게 정직한 자는 남을 속일 운명이다.
 
  ―무명씨
 
  당신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내는 이 편지를 쓰는 동안 저는 <라보엠>을 듣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그대의 찬 손>을 반복해서 듣고 있습니다. 추운 파리의 다락방에서 루돌프가 폐병에 걸린 미미의 손을 잡으며 부르는 곡, <그대의 찬 손>. 가난하고 고단한 삶 때문에 루돌프와 미미는 헤어지고 결국 미미는 루돌프를 찾아 길에 나섰다가 쓰러지지요. 아마 당신은 기억할 수 없으실 테지만 우리가 처음 만난, 한강변이 내려다보이던 그 카페에서도 틀어주었던 바로 그 곡입니다. 라보엠, 방랑자, 또는 보헤미안적 기질이라는 뜻이지요. 보헤미아를 어원으로 한, 멋진 어휘입니다. 사전을 펴보니, bohe`me : a. 방랑하는 ; 자유분방한 n. 자유 방종한 생활을 하는 사람, 이라고 나와 있군요 자유. 당신은 자유, 그러면 무슨 말이 떠오르시나요? 저는 반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스무 살 무렵, 누군가 건네준 14K 금반지. 그 반지는 제 손 어느 손가락에도 잘 맞지 않았습니다. 새끼손가락에는 헐거웠고 중지에는 작았습니다. 그나마 애써 끼어넣을 수 있었던 손가락은 왼손 약지였습니다. 그 반지를 제게 건넸던 사람과 저는 약 반 년쯤, 따스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 세월은 제게 그 반지를 만지작거리는 버릇만을 남겼습니다. 처음에는 비누질을 할 때, 반지 사이에 비누가 끼기도 하고 얼굴을 비비거나 할 때 작은 생채기를 내기도 했지만 저는 점차 그 반지에 익숙해졌더랬습니다. 그렇게 제가 완전히 그 반지에 익숙해질 무렵이 되자 그 사람은 떠났습니다. 그 가을에 전 몇 달이나 학교에 나가지 않고 방에 틀어박혔지요. 스무 살 무렵엔 누구나 한번쯤 은둔자가 되곤 하지요. 그사이 제 체중은 15킬로그램이나 불어버렸습니다. 몇 달 만의 외출을 준비하느라 입어본 바지의 허리가 맞지 않는 것을 보고서야 그사이 몰라볼 만큼 살이 붙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예요. 그리고 그때서야 저는 왼손 약지를 압박하는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 불안감을 아세요? 반지가 영원히 빠지지 않을 거라는, 그리하여 평생 그 반지를 내 몸의 일부처럼 받아들이고 살아야 하리라는, 그 공포를 아세요? 저는 비눗물도 칠해보고 바세린 연고도 발라보고 별의별 방법을 다 써보았지만 반지는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느라 손가락은 더 부어만 갔을 뿐입니다. 밤에는 잠도 오지 않고 하루 종일 모든 신경은 그 손가락에 가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저는 틈만 나면 무엇이나 먹어치웠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어느덧 그 반지에 길들여져갔습니다. 가끔 반지를 의식하게 될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몸에 철심을 박고도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몸에 결코 융화될 수 없는 어떤 이물질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이에요.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지금까지 저는 그 조그만 반지에 갇혀 있었던 거지요.
  어느새 <그대의 찬 손>이 끝났네요. 루돌프가 미미를 버리고 거리를 헤매고 있는 참인가봐요.
  그날 당신은 그 카페에 먼저 나와 있었습니다. 제가 들어서서 당신에게 인사를 건네자 앉은 자리에서 손만 불쑥 내밀어 악수를 청해왔었지요. 저는 머뭇거리면서 당신의 손을 가볍게 잡았습니다. 이제야 말씀드리지만 그때 당신의 손은 차가웠습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혹, 초등학교 시절,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을 두 대야에 나누어 담고 손을 담가보신 적이 있는지요? 먼저 차가운 물에 손을 담갔다가 뜨거운 물로 갑자기 옮겨가면 그 뜨거운 물이 순간적으로 차갑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열을 감지하는 피부 세포가 순간적으로 혼동을 일으키는 그런 현상이지요. 그때 악수를 나누던 당신의 손에서 저는 그런 혼란을 감촉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가운 손을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따스한 손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항상 손에 땀이 배어 있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선 거친 각질이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당신의 손과 같은 혼란한 느낌을 전해준 사람은 없었습니다. 당신에게 제 당혹을 감추기 위해 저는 얼른 메뉴판으로 눈을 돌렸던 것을 기억합니다.
  당신은 커피를 주문하고는 담배를 빼 물었습니다. 당신의 담뱃갑에는 담배가 서너 개비밖에 남지 않았지만 직육면체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정연한 담뱃갑을 약 20도 정도 기울여서 당신은 하얀 담배 한 개비를 쳐올렸습니다. 그리고는 왼손 엄지와 중지만을 이용해서 담배를 집어들었습니다. 저는 놀랐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담배를 집을 때 예외 없이 엄지와 검지로 집어들기 때문이었습니다. 엄지와 중지로 담배를 빼어든 후, 당신은 의장대가 총검술을 하는 것처럼 담배를 한 바퀴 휘익 돌려 입에 물었습니다.
  바로 그런 순간들입니다. 잠실철교 위에서 두 대의 전철이 만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나요? 김포 쪽으로 해가 지는 그런 순간에 낙조를 베어내며 달려갑니다. 그럴 때면 저는 사라진 이들을 생각합니다. 제가 만약 어느 외로운 혼령이라면, 먹지 않아도, 잠들지 않아도 좋은 귀신이라면 저는 한 일 년쯤 그때 제가 서 있던 그 강변에 서 있고 싶습니다. 과도하게 아름다운 장면을 보면 죽고 싶은 까닭은 왜일까요? 창 밖을 내다봅니다. 건너편 아파트의 콘크리트벽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을인데도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습니다. 적어도 제 창 밖 풍경만큼은요. 이럴 때마다 저는 담배를 피우곤 합니다. 그럼 그 연기가 그 지리한 풍경들을 적절히 가려주고 굴절시켜줍니다.
  그날 당신이 담배를 꺼내는 그 장면에서 비릿한 유혹의 냄새를 맡았습니다. 창가에서 비쳐 들어오는 늦은 오후의 햇살이 당신의 손을 반절만 비추면서 음영을 뚜렷하게 드러내주고 있었습니다. 지구의 자전이 진행됨에 따라 당신 손에 깃든 어둠이 더 깊어지고 있었습니다. 전 그 어둠이 좋았습니다. 종국에는 윤곽만이 드러나는 그런 순간을 사랑합니다.
  손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림을 배울 때, 가장 어려운 게 사람의 손이라고 하지요. 손은 가장 섬세하면서 우리 몸 중에서 가장 많은 골짜기와 구릉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런 만큼 어두운 부분과 밝은 부분의 대조가 두드러집니다. 또 주름은 얼마나 많은지요. 그리고 그 수다한 마디들. 아마도 손은 우리 몸 중에서 가장 많은 관절을 지니고 있을 거예요. 그 관절들은 제각각 구부러지면서 다양한 표정을 연출해냅니다. 게다가 어느 누구도 손을 성형하지는 않습니다. 얼굴과 몸매는 바꿀 수 있어도 손은 그럴 수 없습니다.
  또한 손에는 옹이가 박입니다. 노동의 흔적이 남는 게지요. 손에 굳은살이 박이지 않은 사람을 쏘아 죽였다는 폴 포트가 기억납니다. 애써 들어간 공장에서 쫓겨나던 80년대 운동권의 이야기도 생각나구요. 손에 박인 옹이 따위가 수많은 사람의 생명과 일생에 그토록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이 저를 위안할 때가 있습니다. 손에 대한 제 믿음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일러주는 게지요.
  그날 저는 당신의 집으로 갔습니다. 당신은 5층짜리 독신자 아파트 4층에 살고 있었습니다. 삐걱거리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달걀이 썩어가는 듯한 냄새가 희미하게 풍겼습니다. 당신은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들어가 서재에 윗도리를 벗어놓고 마루로 나왔습니다. 서재를 좀 봐도 될까요? 당신은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손짓으로 저를 불렀습니다. 참, 이상했습니다. 보통 한국사람들은 손바닥을 아래쪽으로 향하게 하여 사람을 부르는데 당신은 그날 손바닥을 위로 하고 새끼손가락 쪽은 깊게 구부리고 검지는 거의 구부리지 않는 동작으로 가볍고 우아하게 손가락을 까닥거렸습니다. 그것은 아주 색정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래요. 그 순간. 영영 휘발되지 않을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당신의 컴퓨터 옆 카피홀더에 꽂혀 있던 한 장의 복사물이 제 운명을 갈랐습니다. 기억하지 못하실 거예요. 당신은 ‘장난’이었노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저는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당신의 그 말은 그저 초탈한 자의 여유로움으로만 보였습니다. 그 카피홀더에는 당신의 오른손이 복사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기억나시나요? 회색 배경에 탁본이라도 뜬 듯한 검은 손자국, 그리고 당신 손금의 결을 따라 흰빛이 줄기줄기 수맥으로 흐르고 있던 그 그림을.
  저는 당신께 졸랐습니다. 그 복사물을 탐했습니다. 당신은 그런 저를 의아하게 바라보았지만 이내 그것을 제게 건네주었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제 방에 잘 걸려 있습니다. 저는 그 회색 배경에 푸른 색을 덧칠했습니다. 그러자 그 복사물에서는 폐가에서 흘러나올 법한 그런 영묘한 광채가 흐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당신. 아름다운 손을 가진, 그리고 그 손을 복사기에 밀어넣을 수 있었던, 황색 불빛이 자신의 손바닥을 훑어갈 때, 저릿한 전율을 느꼈을, 한 번이고 두 번이고 계속하면서 마음에 드는 출력물이 나올 때까지 ‘복사’ 버튼을 눌렀을,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컴퓨터 옆 카피홀더, 그러니까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걸어놓은 당신, 이라는 사람에게 저는 난생 처음으로 위안다운 위안을 받으리라는 예감을 느꼈습니다.
  당신은 말했습니다. 다음에는 얼굴을 해볼 작정이야. 얼굴을 복사기에 집어넣고 돌리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커버를 덮을 수 없기 때문에 배경이 새까매져. 복사기에 닿은 부분만 허옇게 찍히지. 유리창에 얼굴을 부빈 것처럼 출력되지. 그리고, 그리고 말야. 눈은 질끈 감고 있기 때문에 마치 변사체처럼 찍히고 말지. 난 눈을 뜨고 싶어. 그런데 그게 쉽질 않아. 만약에 눈을 뜨고 찍는다면 복사기에서 방출되는 빛이 반사될 테니 그 부분만 하얗게 빛이 날 거야. 검은 얼굴에 빛나는 하얀 점. 멋질 것 같지 않아? 아니요. 저는 고개를 젓고 싶었습니다. 아니예요, 당신. 제발 그러지 말아요. 전 얼굴 복사물은 보고 싶지 않아요. 그렇지만 저는 입밖으로 소리내어 말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당신 눈을 버리고 말 거예요, 라고 말했을 따름이었지요.
  눈, 저는 눈을 믿지 않습니다. 눈은 너무 강렬합니다. 당신은 왜 사람의 눈을 보지 않는 거지?라고 당신이 물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래요. 저는 사람의 눈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경구를 저는 부정합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기보다는 스크린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속여야 할 때, 눈을 사용합니다.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제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고 소리를 질러대곤 했습니다. 내 눈을 봐. 내 눈을 좀 똑바로 쳐다보란 말야. 저는 부들부들 떨면서 그 사람의 눈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사람의 눈에는 여린 물기가 어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그 사람이 지껄인 모든 말들은 모두 변명 아니면 거짓이었습니다.
  이런 말을 주절거리다니 우습군요. 당신이 무슨 죄가 있어서 제 이런 넋두리를 다 들어주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왕 들어주기 시작한 마당이니 조금만 더 읽어주세요.
  그 사람의 손을 기억합니다. 우리 학교 음악대학에는 연습실이 있습니다. 두 평 남짓한 방에 피아노 한 대, 의자 하나 그리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복도로 난 창도 없고 문만 잠그면 완벽하게 밀폐되는 곳입니다. 물론 방음장치도 완벽하지요. 그 방을 전 좋아했습니다. 새벽 무렵, 여간해서 습기가 빠져나가지 않는 자취방을 빠져나와 악보 한 무더기를 움켜쥔 채 그 연습실로 들어서면 기분이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습니다. 언덕빼기에 자리잡은 음악대학으로 올라갈 때면 이미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도서관을 향하고 있을 때, 전 온전히 저 혼자만을 위해 그 연습실로 향하고 있었던 게지요. 이미 사람이 들어 있는 연습실도 있습니다. 저는 조용히 이 방 저 방 문을 열어보면서 빈방을 찾습니다. 비어 있는 방을 찾으면 그 방에 앉아 악보를 펼쳐듭니다. 그렇게 아침나절을 다 보내고 나면 몸은 술취한 소년처럼 기분좋을 만큼만 피로합니다.
  저는 그 사람에게 그 기쁨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새벽마다 경험하는 음의 잔치에 대해, 모든 것을 쏟아붓는 몰입에 대해 말이지요. 그러자 그 사람이 제 연주를 듣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열정>을 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비록 그때 저는 고개를 떨구고 있었지만 몸 어딘가가 쏴아 하면서 무너져내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저는 그 곡을 연주할 수 있었습니다. 그 정도는 입시를 준비하는 사람이면 충분히 칠 수 있는 곡이거든요. 그래도 그날 오후, 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 곡을 밤늦게까지 연습했습니다. 오로지 저만을 위해 지내왔던 연습실의 일상이 갑자기 그 사람을 위한 시간으로 변모된 거예요.
  며칠 후, 그 사람은 연습실에 따라왔습니다. 저는 악보를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연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것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모르세요? 당신을 위해서 며칠 동안 그 악보를 모두 외워버렸는걸요. 그러나 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두 손을 건반 위에 올려놓고 힘차게 두들겨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제 등뒤에 바싹 붙어서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눈을 반쯤 감은 채 그의 시선을 즐기고 있었구요. 생각해보세요. 제가 그토록 좋아하는 베토벤을 그의 시선 아래에서 연주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그런데 그때 그의 손이 제 목덜미에 와닿는 것이었어요. 음이 흐트러졌습니다. 그러나 곧 마음을 다잡고 연주에 열중하려고 애썼습니다. 제 목덜미에 손을 올려놓은 채로 그는 제 귀에 속삭였습니다. 계속 연주해줘. 멈추지 마.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요. 멈추지 않을게요. 그의 손은 천천히 목덜미를 지나 쇄골을 더듬다가 제 젖무덤으로 내려왔어요. 연주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고장난 메트로놈처럼 박자가 빨라졌다 느려졌다 했어요.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이래 단 한번도 고장난 적이 없었던 제 심장 속의 메트로놈은 꺼졌어요. 대신 그의 손이 제 메트로놈이 된 거지요. 그의 손의 움직임에 따라 제 음악은 춤을 췄어요. 그 사람의 손도 차가웠어요. 아니 어쩌면 제 몸이 뜨거웠을지도. 저는 몸을 뒤틀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건반에 올려진 손만은 움직일 수 없었어요. 저는 그를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었습니다. 저는 피아노를 연주하고 그는 저를 연주했어요. 그리고 제가 연주한 <열정>은 그를 연주했겠죠. 음이 흐트러질수록 박자가 엇갈릴수록 그의 움직임은 빨라지고 집요해졌어요. 전 음악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알았어요. 손 하나만으로도 이토록 사람을 미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런 혼란 앞에서 음악이란 얼마나 무력한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저는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어요. 화가 났습니다. 연주를 제대로 끝마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수없이 틀린 박자와 음 때문에 말입니다. 저는 무너졌습니다. 건반 위에 엎어질 때, 쾅 하는 불협화음이 울려퍼졌을 거예요. 그는 그런 저를 안아 일으켰습니다. 그의 혀가 입 속으로 들어왔지만 전 그의 혀보다 제 얼굴을 감싸고 있는 그의 두 손이 더 감미로웠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과 보냈던 몇 번의 밤. 저는 갈구했습니다. 그 사람이 연습실에서처럼 저를 연주해주기를, 제 메트로놈을 파괴해주기를, 음정과 박자가 마구 흐트러져서 저를 분노케 하기를 말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의 손은 단지 기계적이고 반복적으로 제 몸을 마사지하듯 만졌을 뿐입니다. 그건 굳이 비유하자면 전자오르간을 연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손, 손을 주세요. 목덜미에서부터 쇄골을 거쳐 제 젖무덤에 이르던, 뱀의 모습을 한 그 손을 주세요. 저는 그 지루한 밤 내내 갈망했습니다. 그러나 단 한번도, 그 사람은 제 말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의 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 사진첩에는 저를 만졌던 사람들의 손이 꽂혀 있습니다. 그의 손은 가장 앞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손가락은 가늘지만 손등은 아주 완강한 몸집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그 시절의 저는 손을 읽을 줄 몰랐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저도 눈을 신뢰했습니다.
  그 사람이 말합니다. 내 눈을 봐. 내 눈을 좀 똑바로 쳐다보란 말이야. 그건 모두 헛소문이야. 나를 믿어. 그때의 저는 그의 눈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믿었습니다. 아니 믿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제 저는 자신의 눈을 보라는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연습실 복도에서 마주친 그 사람과 제 친구. 저는 알았습니다. 제 친구도 그 사람을 위해 어떤 곡인가를 연주했음을, 그리고 그에게 연주당했음을. 그리하여 저는 제 친구의 눈에 남아 있던 푸른 색정의 기운을 저는 보았습니다. 그 사람의 손이 훑고 지나갔을 제 친구의 목덜미와 쇄골 언저리와 젖무덤을 생각했습니다.
  지루하죠? 신파지요? 그렇습니다. 저도 알아요. 그런데 신파는 계속됩니다. 끝이 없어요. 소재만 바꾸어서 계속 올려집니다. 당신의 손이 그립습니다.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손, 결코 제 얼굴을 붙잡고 눈을 보라는 따위의 말을 하지 않는 손, 제 음정과 박자를 흐트러트리지 않는 손. 그런 당신의 손이 오늘따라 무척이나 살갑게 추억됩니다.
  저는 요사이 조각을 배우고 있습니다. 놀라셨군요. 그래요. ‘그 사건’ 이후로 시작한 일입니다. 아직은 점토로 하고 있지만 곧 대리석 조각도 할 수 있게 될 거라고 선생님이 말씀해주셨습니다. 어서 대리석을 만져볼 수 있기를 꿈에서도 그리고 있습니다. 혹, 로댕의 <성당>이나 <비밀>이라는 작품을 아시나요? 두 작품의 공통점은 둘 다 손을 오브제로 하고 있다는 거지요. 로댕은 눈부신 대리석으로 두 개의 손을 조각하여 서로 마주 보게 하고는 그 작품에다 <비밀>이라는 제목을 붙였지요. 이상적인 인간의 몸을 밀로의 <비너스>가 현현하고 있다면 손은 단연 로댕의 몫입니다. 그 손은 살아 있는 사람의 손보다 더 살아 있으면서도 비현실적입니다. 너무 사실적이어서 현실에서는 차마 만나볼 수 없는 그런 손입니다. 그것에다가 로댕은 <비밀>이라는 제목을 부여했습니다. 실로 담대하지 않나요? 로댕 이전에 그 누구도 손만을 독립적인 오브제로 작업한 사람이 없었을 뿐 아니라 그토록 관념적인 제목을 붙인 사람도 없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로댕은 조금 거친 질감의 석재를 사용하여 이번에는 두 손을 마치 두 명의 무희가 마주 보고 춤을 추려는 듯한 자세로 약간 엇갈리게 배치하여 조각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작품에다가 <성당>이라는 제목을 붙였지요. 역시 멋지지요? 로댕에 필적할 만한 사람이 있다면 역시 미켈란젤로입니다. 그의 대표작 <다비드>는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습니다. 5미터에 달하는 거구의 다비드, 완벽한 균형과 비례는 보는 사람을 한순간 경건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진실로 저를 얼어붙게 했던 것은 다비드의 손이었습니다. 아카데미아 미술관 앞에는 그 손만을 찍어 만든 엽서가 있습니다. 아마 저와 같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 손에 감탄하고 돌아갔던 탓이겠지요. 로댕의 작품에는 없는 진실이 미켈란젤로에게는 있습니다. 그의 손에는 핏줄이 있습니다. 늘 혈관을 못 찾아 헤매는 간호사가 본다면 주사바늘을 찔러넣고 싶을 그런 핏줄을 대리석으로 조각해냈습니다. 로댕의 손이 현실을 추상한 이상이라면 미켈란젤로의 손은 이상을 제거한 현실입니다.
  로댕은 이탈리아 여행 이후에 작품의 경향을 바꾸게 됩니다. 그가 아마 미켈란젤로의 저 손을 보지 않았던가 싶어요. 이제 더이상 사실적일 필요는 없어졌다, 고 그는 절망했을 것입니다. 평생을 해도 이를 수 없는 어떤 세계에 다른 누군가가 멋지게 깃발을 꽂아버렸다는 사실을 그는 명백하게 알았을 테지요. <비밀>과 <성당>이 모두 이탈리아 여행 이후의 작품이라는 것도 그 탓일 거예요.
  저는 그 두 사람이 하지 못한 일을 하고 싶습니다. 이상적 현실도 현실적 이상도 아닌, 그 둘 사이를 진동하는 손을 만들고 싶습니다. 현실에서는 이상을 꿈꾸고 이상에서는 현실로 하강하려는 진짜 인간의 손을 말입니다. 당신의 손에서 제가 느꼈던 혼란스런 기분, 연습실에서 그 사람의 손이 제게 불러일으켰던 돌개바람 따위.
  저는 한때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한 이후로 우리집은 두 칸짜리 방으로 옮겨앉고 저는 그 방에서 남동생과 함께 자랐습니다. 근친상간을 상상하고 계시겠군요. 아니예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동생이 고등학생이 되던 해였을 거예요. 언제나처럼 무심코 방문을 열고 들어가다가 동생이 자신의 성기를 움켜쥐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던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영화관에서 갑자기 필름이 끊어지는 순간, 그 불편한 정지. 그런 게 이어졌어요. 서로가 서로의 눈을 피하면서 제가 아주 짧은 찰나에 본 것은 성기를 그대로 움켜쥐고 있던 동생의 오른손이었어요. 왜 그는 그 손을 떼고 황급히 성기를 수습하지 않을까. 저는 참 의아했던 것 같습니다. 문을 닫고 마루로 나와 찬 공기를 들이마시며 저는 동생의 손이 한동안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비현실적으로 크고 붉게 보이던 그의 손, 그 손에는 좌절된 쾌락, 쓸쓸함 따위가 뒤섞인 채로 엉겨 있었겠지요. 저는 그에게 연민을 느꼈습니다.
  그날 밤 저희 남매는 쉽게 잠들지 못했습니다. 제 동생은 여렸습니다. 또래 아이들에게 늘 맞고 자랐고 유일한 낙이라고는 방구석에서 철 지난 문고판 소설을 읽는 것이 다였으니까요. 그런 그가 수음을 했다는 사실이 저를 안쓰럽게 했습니다. 그렇게 두세 시간을 잠 못 이루다 저는 손을 뻗어 그애를 어루만져주었습니다. 그가 제 손을 뿌리쳤습니다. 저는 조용히 그애의 잠옷 솔기 속으로 다시 손을 밀어넣었습니다. 남자의 성기를 그때 처음 만져보았습니다. 동생은 동상처럼 굳어 숨을 불규칙하게 쉬고 있었습니다. 저는 부드럽게, 그러나 조금은 서툴게 동생의 성기를 만져주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도 남자가 사정을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동생은 어느 순간에 이르자 제 손을 가만히 잡고 제자리로 갖다놓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동생은 식탁에 앉아 묵묵히 밥을 먹고 일어나 학교로 향했습니다. 이상한 침묵이었습니다. 책가방을 건네주던 제 손에서 거칠게 가방을 빼앗았고 그렇게 도망치듯 학교로 가버렸습니다. 그렇게 사흘쯤 말없는 낮과 밤이 흘렀고 그러다 동생은 제게 화를 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습니다. 동생은 누군가 자기 책상을 뒤졌노라고 말했습니다. 아닐 거야. 제가 말했고 동생은 그게 저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화가 났습니다. 아니야! 동생은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했고 제가 화를 내자 갑자기 손을 들어 제 뺨을 때렸습니다. 아픔 때문이 아니라 놀라움 때문에 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처음이었습니다. 비록 한 살 터울이었지만 동생은 한번도 제게 그렇게 대든 적도 없었고 하물며 때린 적은 더더군다나 없었거든요.
  그날 밤 저는 뭘 잘못했는지도 몰랐지만 동생에게 사과했습니다. 동생은 대꾸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동생의 성기를 다시 만져주었습니다. 동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무엇인가 분수처럼 제 손 안에서 터졌고 그제서야 동생은 미안해, 라고 짧게 말하고 돌아누웠습니다. 저는
  축축해진 손을 그의 잠옷 속에서 빼내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냄새 맡아 보았습니다. 사람을 쓸쓸하게 만드는 냄새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정작 저를 푸근하게 만든 것은 그제서야 알았던 제 손의 또다른 효용 때문입니다.
  어렸을 적 배웠던 피아노를 다시 배우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 언저리입니다. 사채할인에 뛰어든 아버지는 다시 예전처럼 돈을 벌어오기 시작했고 우리집은 큰 집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아버지는 하얀색 그랜드 피아노를 사주셨고 동생과 저는 다시는 함께 잠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동생을 볼 때면 성기를 움켜쥐고 있던 그 가련하고 완강한 오른손이 떠오르곤 했습니다.
  동생은 죽었습니다. 운전면허를 딴 첫해 강변도로를 질주하다가 중앙선을 넘어 마주 오던 트럭과 정면충돌 했습니다. 온 식구들이 달려갔을 무렵에는 이미 동생은 들것에 실려 담요로 덮인 후였습니다. 응급요원들이 들고 가던 그 들것 아래로 동생의 피투성이 손이 죽은 벌집처럼 덜렁거리고 있었습니다. 부모님들께서 담요를 젖히고 동생의 얼굴을 확인하려 할 때, 저는 살며시 동생의 손을 잡아보았습니다. 차가웠고 끈적거렸습니다. 그 가련하고 완강한 손이 이미 굳어가고 있었습니다.
  동생의 그 손에서 저는 사춘기의 불안과 출구 모르는 열정과 비정상적인 차가움, 돌이킬 수 없는 완강함을 모두 느꼈습니다. 비록 그 순간이 짧았다 해도 영원히 각인될 그런 느낌, 바로 그런 느낌을 조각하고 싶습니다.
  아, 이제 <라보엠>을 그만 들어야겠습니다. 이 편지를 쓰는 동안 벌써 다섯 번은 더 들은 것 같아요. 폐병쟁이 미미는 이미 여러 번 죽었고 루돌프가 그때마다 울부짖는 것도 듣기 괴롭습니다. 그래요.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이제 당신이 늘 궁금해하시던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차례인 것 같아요. 입 밖으로 꺼내 말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당신이 결혼하기 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쯤 누군가 제게 당신이 결혼한다는 사실을 일러주었을 거예요. 저도 언젠가는 당신이 결혼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당신이 공연하던 대학로의 소극장으로 갔습니다. 세 달 간이나 장기공연을 하던 그 어둡고 습기찬 소극장에 저는 여러 번 갔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의 대사를 줄줄 외울 수도 있었습니다. 창문을 열어라, 이 개새끼들아. 새들로 하여금 유리창에 제 머리를 부딪게 하는 자들이여. 뒤돌아보지 말라. 소금기둥이 될 테니. 나는 내 이 튼튼한 두 발로 걸어간다. 저기 저 소돔과 고모라의 땅으로.
  그 당시 한참 유행하던 페미니즘 연극의 하나였지요. 당신의 목소리는 소극장을 쩡쩡거리며 울려퍼졌고 풀어헤쳐진 긴 머리를 추어올리는 당신의 하얀 손은 푸른 조명을 받아 칼날처럼 번득였습니다. 칼날― 그래요, 칼날이었습니다. 흰 버선발로 둥실둥실 떠다녀도 아무도 다치게 하지 않는, 그러나 등골이 서늘한 그런 작두의 날 말입니다.
  당신을 인터뷰하도록 시켰던 잡지사의 부장은 당신을 일컬어 한마디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당이야.
  맞습니다. 당신은 샤먼이었습니다. 인터뷰를 하고 그뒤 당신의 공연을 보러 다니는 세월 동안에 저는 새끼무당처럼 신들렸습니다. 당신의 아파트로 찾아간 저를 당신은 그 혼란스런 온도의 손으로 위안해주었습니다. 그런 밤이 지난 아침이면 저는 당신 아파트 한켠에 처박힌 조율 안 된 피아노로 쇼팽의 <녹턴>을 연주했습니다. 오직 한 사람, 당신을 위해서 말입니다.
  부담스러우신가요? 괜찮습니다. 그냥 그런 제 자신이 좋았을 뿐이에요. 당신은 <녹턴>을 좋아했습니다. 이미 연주자의 길에서 벗어난 저였지만 당신이라는 단 한 사람의 청중을 만족시킬 수 있었던 까닭에 행복했습니다.
  <너희들의 제국>.
  당신의 그 연극이 막을 내리던 날, 비로소 당신의 남편이 될 사람을 만나고야 말았습니다. 뒤풀이까지 따라간 저를 당신은 불편해했습니다. 어느새 만취한 당신은 제 어깨를 끌어안고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때 연습실에서 저를 연주하던 그 선배를 생각했습니다. 대학교 3학년 때부터 머리를 기르기 시작하더니 졸업하자마자 항공사 승무원과 결혼해버린 그 여자를 생각했습니다. 언젠가 우연히 백화점에서 쇼핑백을 가득 끌어안고 나오는 그 선배를 만나서 차를 마신 적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언제나 해외에 있어. 그게 편해. 남자가 아직도 좋아지진 않아. 하지만 사람 사는 일이란 늘 그렇고 그렇잖아. 언제 한번 놀러 와. 저는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결혼 소식은 그보다 더 아팠습니다. 이상하죠? 당신은 한번도 그 선배처럼 세상의 끝과 바닥을 보여준 적이 없었는데.
  그날 뒤풀이에서 돌아와 여러 사람의 손을 생각했습니다. 사진으로 남아 있는 사람도 있었고 당신처럼 검은 복사물로 남겨진 사람, 그리고 제 동생의 손. 그 모든 것을 둘러보고 나서야 저는 난생 처음 제 손을 골똘히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낯설 수가!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그동안 한번도 제 손을 정면으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예요. 손등도 보고 뒤집어서 손바닥도 찬찬히 살펴보았습니다. 피아노를 치거나 아니면 로션을 바르기 위해서 바라보는 그런 실용적인 시선말고 아무 목적도 의도도 없이 다른 사람의 손을 탐했듯이 그렇게 살펴본 적이 한번도 없었더라는 거죠.
  저는 영화에 나오는 살인자가 제 손에 묻은 피를 살펴보는 그런 자세로 밤새도록 제 손을 살펴보았습니다. 그제서야 십 년 동안 제 왼손 약지를 멍들이며 조여왔던 그 반지가 눈에 띄었습니다. 이상도 하지요. 그 반지는 기생충이고 저는 숙주가 된 느낌. 그래요. 제 인생은 늘 누군가의 숙주였다는 절망. 저는 십 년 만에 처음으로 다시 비누질을 하고 미친 듯이 그 반지를 빼려 애썼습니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이었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다른 사람의 손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인생을 생각했습니다. 세면기 앞에서 저는 거울을 보았습니다. 어느새 눈가에 생겨나기 시작한 주름살. 기미. 그리고 윤기 없이 흘러내리는 귀밑머리를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손에 남은 비누거품을 깨끗이 헹구고 마루로 나와 공구함을 열었습니다. 망치를 꺼내고 그것을 조심스럽게 들어보았습니다. 의외로 가볍더군요.
  그리고는 망치로 제 왼손을 내리쳤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살살 내리쳐서 아프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번 오른손을 치켜들고 좀더 강하게 내리쳤습니다. 왼손 약지가 뭉그러지면서 살갗 밖으로 허연 뼈가 드러났습니다. 처음 보는 제 몸 속의 뼈. 나중에 병원에서 약지와 새끼의 관절이 골절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한번 더 내리쳐 완전히 부수어버렸습니다. 왼손에 끼고 있던 반지가 찌그러지면서 뼈 속으로 박히는 것을 아련하게 느끼면서 실신했습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너무 싱겁나요? 그렇지만 그 사건 덕택에 드디어 저는 그 반지를 뺄 수 있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 아무 것도 연주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어느 누구도 저를 연주하게 만들지 않을 거예요. 대신 당신도 아시다시피 조각을 시작했지요.
  저는 로댕도 미켈란젤로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었지요. 그들이 그렸던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매료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그들이 하지 못한 일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두 손가락이 뭉그러진 제 왼손을 조각할 거예요. 그 속에는 제가 그동안 탐해왔던 모든 손들의 그림자가 깃들어 있을 거라고 믿어요.
  당신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당신도, 당신과 결혼한 당신의 남편도, 아내가 불감증이라고 알고 있을 그 승무원도, 트럭에 짓이겨져 세상을 떠난 제 동생의 축축한 정액의 질감도, 제가 조각할 그 손에 녹여내겠습니다.
  아, 석고가 적당히 굳었군요.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할 시간입니다. 부디, 건강하세요, 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