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123호 창경궁(昌慶宮)~ 홍화문과 외행각

2011. 3. 11. 22:33전국 문화재와 박물관/국가지정 문화재

 

서울 종로구  와룡동 2-1 에 위치한 창경궁(昌慶宮) 은 사적  제123호로

조선시대 궁궐로 태종이 거처하던 수강궁터에 지어진 건물이다

성종 14년(1483)에 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를 위해 창경궁을 지었다.

 처음 지을 당시의 건물은 명정전·문정전의 정전과 수령전·환경전·경춘전·인양전·통명전 등의 침전 및

양화당·여휘당·사성각이 있었다. 조선시대의 궁궐중에서는 유일하게 동쪽을 향해 지어졌다.

처음에는 별로 사용되지 않다가 임진왜란 때에 경복궁·창덕궁과 함께 불에 탄 이후,

창덕궁과 같이 다시 지어져 조선왕조 역사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숙종의 사랑을 받던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독살하려는 못된 행동을 저지르다가 처형을 당했는데,

 당시 희빈은 주로 취선당에서 생활하였다. 또한 영조는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일을 저질렀는데,

세자가 갇힌 뒤주를 궁궐 안의 선인문 안뜰에 8일간이나 두었었다.

창경궁은 순종이 즉위한 후부터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09년 궁궐 안의 건물들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였으며, 궁의 이름을 창경원으로 낮추기도 하였다. 그

러다가 1984년 궁궐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원래의 이름인 창경궁을 되찾게 되었고,

궐 안의 동물들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기면서 벚나무 역시 없애버렸다.

장조·정조·순조·헌종을 비롯한 많은 왕들이 태어난 궁으로,

광해군 때 다시 지어진 정문·정전들이 보존되어 있으며, 옆에 있는 창덕궁과 함께

 조선시대 궁궐의 역사를 살피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유적이다

 

 

 

 

 

 

 

 

홍화문은 창경궁의 정문으로 명정전과 마찬가지로 동향하였다.

조선 성종 15년에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광해군 8년에 재건되어 오늘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우진각지붕의 건물로,

기둥 위에는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이 놓이고,

 다포계 양식(樣式)의 외오포작 이출목, 내칠포작 삼출목의 공포를 짜았는데,

견실한 구조와 공포의 짜임은 조선 초기 형식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정면의 3칸에는 각각 판문을 달고 그 위로는 홍살을 하였으며,

북쪽에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마련돼 있다. 이층은 우물마루에 연등천장을 꾸몄다.

 홍화문의 좌우로는 궁장(宮墻)이 남북십자각을 지나 궁역을 형성하였다.

 

 

 

 

 

 

 

 

 

 

 

 

 

옥천교는 명당수가 흐르는 어구(御溝) 위에 설치한 다리다.

조선 왕궁은 모두 명당수 위의 석교를 건너서 정전으로 들어가도록 만들어졌다.

옥천교는 길이가 9.9미터, 폭6.6미터와 두 개의 홍예로 구성되었는데,

 홍예가 연결되는 중앙에 귀면(鬼面)이 조각되어 잡귀를 쫓고 있다.

 다리 좌우에는 돌난간이 조각되었는데, 난간 가장자리에 법수(法首)를 세우고

 네 개의 연잎 동자주(童子柱)를 세워 5칸을 형성하고,

한 장의 돌로 만든 풍혈판이 설치되었으며 돌란대가 얹혀 있다.

 교상(橋床)은 장마루 같은 청판돌로 짜고 중앙에는

 어도(御道)를 한 단 높게 만들었다. 이 다리는 1483년 조성되었다.

 

 

 

 

 

 

 

 

 

 

 

 

 

 

 

 

 

 

 

 

 

 

 

 

 

 

 

 

 

 

 

 

명정문은명정전을 둘러싼 월랑 중 명정전과 마주보고 있는 동월랑의 중앙부에 있으며,

창경궁의 외문인 홍화문보다 안쪽에 놓여 중문의 기능을 갖는 평삼문이다.

위치로 보아서 명정전의 동서 중심축선상에 정확히 놓이지 않고 남쪽으로 약 1.2미터 벗어나 있다.

문의 좌우에 연결된 동월랑을 어느 정도 명정문에 맞추어 배치하였기 때문에,

이에 의하여 둘러싸인 명정전의 중정(中庭)은 정확한 방형이 아니고 기울어져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다포계 건물인데, 잘 다듬은 원형 주초석 위에

 중앙열의 주열(柱列)에는 각 칸마다 2매씩의 육중한 판문을 달아 안으로 열리게 하였다.

 이 건물은 포작(包作)과 건축의 형식으로 보아 명정전과 함께

광해군 때 재건되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