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123호 창경궁(昌慶宮)~ 숭문당과 함인정

2011. 3. 14. 00:04전국 문화재와 박물관/국가지정 문화재

 

서울 종로구  와룡동 2-1 에 위치한 창경궁(昌慶宮) 은 사적  제123호로

조선시대 궁궐로 태종이 거처하던 수강궁터에 지어진 건물이다

성종 14년(1483)에 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를 위해 창경궁을 지었다.

 처음 지을 당시의 건물은 명정전·문정전의 정전과 수령전·환경전·경춘전·인양전·통명전 등의 침전 및

양화당·여휘당·사성각이 있었다. 조선시대의 궁궐중에서는 유일하게 동쪽을 향해 지어졌다.

처음에는 별로 사용되지 않다가 임진왜란 때에 경복궁·창덕궁과 함께 불에 탄 이후,

창덕궁과 같이 다시 지어져 조선왕조 역사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숙종의 사랑을 받던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독살하려는 못된 행동을 저지르다가 처형을 당했는데,

 당시 희빈은 주로 취선당에서 생활하였다. 또한 영조는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일을 저질렀는데,

세자가 갇힌 뒤주를 궁궐 안의 선인문 안뜰에 8일간이나 두었었다.

창경궁은 순종이 즉위한 후부터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09년 궁궐 안의 건물들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였으며, 궁의 이름을 창경원으로 낮추기도 하였다. 그

러다가 1984년 궁궐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원래의 이름인 창경궁을 되찾게 되었고,

궐 안의 동물들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기면서 벚나무 역시 없애버렸다.

장조·정조·순조·헌종을 비롯한 많은 왕들이 태어난 궁으로,

광해군 때 다시 지어진 정문·정전들이 보존되어 있으며, 옆에 있는 창덕궁과 함께

 조선시대 궁궐의 역사를 살피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유적이다

 

 

 

 

 

 

 

 

숭문당은 조선 경종 때 건립되었으며,

순조 30년에 큰 불로 소실된 것을 그해 가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崇文堂'의 현판과 '日監在玆'라 쓴 게판은 영조의 어필이다.

영조는 특히 학문을 숭상하고 영재를 양성하였는데,

이곳에서 친히 태학생을 접견하여 시험하기도 하고

때로는 주연(酒宴)를 베풀어 그들을 격려하기도 하였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홑처마이며,

지형에 따라 앞면에만 방형의 장초석을 사용하여 누각처럼 세웠다.

기둥 위에는 간단한 초익공의 공포를 짜았고, 기둥 사이에는

화반 없이 굴도리 밑에 장여를 받고 있는 소로만을 끼워 장식하였다.
평면으로 보아 전후와 남쪽에 퇴간을 두고 마루를 깔았으며,

가운데칸의 마루와 동선을 연결시켰고 그 좌우에 방을 놓았다.

 

 

 

 

 

 

 

 

 

 

 

 

 

 

 

 

 

 

 

 

 

 

 

 

 

 

 

 

 

 

 

 

 

 

 

 

 

 

 

 

 

 

 

 

 

함인정은 원래 성종 15년에 지은 인양전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인조 11년(1633)에 인경궁의 함인당을 이건하여 함인정이라 한 것이다.

이곳은 특히 영조가 문무과거에서 장원급제한 사람들을 접견하는 곳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이며,

기둥 위에는 이익공의 공포를 짜았고, 주간에는 화반 두 개씩을 놓았다.

내부에는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는데, 내진주(內陳柱)로 구획된 마루는 한 단 높게 처리하여

그 위로는 우물천정을 하고 사방둘레의 퇴간(退間)에는 연등천정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