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123호 창경궁(昌慶宮)~경춘전과 환경전

2011. 3. 18. 00:10전국 문화재와 박물관/국가지정 문화재

서울 종로구  와룡동 2-1 에 위치한 창경궁(昌慶宮) 은 사적  제123호로

조선시대 궁궐로 태종이 거처하던 수강궁터에 지어진 건물이다

성종 14년(1483)에 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를 위해 창경궁을 지었다.

 처음 지을 당시의 건물은 명정전·문정전의 정전과 수령전·환경전·경춘전·인양전·통명전 등의 침전 및

양화당·여휘당·사성각이 있었다. 조선시대의 궁궐중에서는 유일하게 동쪽을 향해 지어졌다.

처음에는 별로 사용되지 않다가 임진왜란 때에 경복궁·창덕궁과 함께 불에 탄 이후,

창덕궁과 같이 다시 지어져 조선왕조 역사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숙종의 사랑을 받던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독살하려는 못된 행동을 저지르다가 처형을 당했는데,

 당시 희빈은 주로 취선당에서 생활하였다. 또한 영조는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일을 저질렀는데,

세자가 갇힌 뒤주를 궁궐 안의 선인문 안뜰에 8일간이나 두었었다.

창경궁은 순종이 즉위한 후부터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09년 궁궐 안의 건물들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였으며, 궁의 이름을 창경원으로 낮추기도 하였다. 그

러다가 1984년 궁궐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원래의 이름인 창경궁을 되찾게 되었고,

궐 안의 동물들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기면서 벚나무 역시 없애버렸다.

장조·정조·순조·헌종을 비롯한 많은 왕들이 태어난 궁으로,

광해군 때 다시 지어진 정문·정전들이 보존되어 있으며, 옆에 있는 창덕궁과 함께

 조선시대 궁궐의 역사를 살피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유적이다

 

 

 

 

 

 

 

 

경춘전은 창경궁의 내전으로 성종 14년에 건립되었다.

그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8년에 재건하였으나,

순조 30년에 불탄 것을 그 34년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이 경춘전은 정조와 헌종이 탄생한 곳이며, 현판은 순조의 어필이다.

 

 

 

 

 

 

 

 

 

 

 

 

 

환경전은성종 15년에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광해군 8년에 중건하였다.

그 후 순조 30년(1830)의 큰 불로 소실되었던 것을

그 34년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곳은 창경궁의 한 내전으로 왕이 늘 거동하던 곳이며,

중종이 이곳에서 승하했고, 효명세자(익종으로 추존)가

승하했을 때는 빈궁(殯宮)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이며

기둥 위에는 이익공의 공포를 짜고 기둥간에는 두세 개씩의 화반을 놓았다.

 건물의 내부에는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고,

외진평주(外陳平柱)와 내진고주(內陣高柱)를 배열하여

 퇴량을 걸고 그 위로는 연등천장을 하고 안쪽으로는

우물반자를 하였다. 대량(大樑)은 내진고주 사이에 걸었다.

 

 

 

 

 

 

 

 

 

 

 

 

통명전은 창경궁의 연조 공간으로 명정전 서북쪽에 있으며,

 왕과 왕비가 생활하던 침전의 중심 건물이다.

창경궁 창건 때 세워졌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재건이 되고, 다시 이괄의 난과 정조 때 화재를 입었다

지금의 건물은 순조 34년에 중건된 것이다. 남향한 전면에는

 월대를 두고 양모서리에는 청동제 드므를 놓고

 그 북쪽에 외벌대 기단 한 단을 두어 건물을 세웠다.

정면은 7칸이고 측면이 4칸인 이익공계(二翼工系) 건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하였다. 지붕 위에는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고, 전후퇴칸을 두었다

북서쪽 일부의 방을 제외하고는 건물 내부 바닥에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는데,

정면으로 보아 양측에 2칸씩 방을 꾸몄음이,

1984년의 발굴조사에서 연도지(煙道址)가 노출됨으로써 확인되었다.

 

 

 

 

 

 

 

 

 

 

 

 

 

 

 

 

 

 

 

양화당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였던 인조가 환궁하면서

이곳에 거처한 일이 있으며, 고종 15년(1878) 철종비 철인왕후가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현판은 순조의 어필이다.

정면 6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이며,

세벌대의 장대석 기단 위에 네모기둥을 세우고 초익공계 포작(包作)을 짜았다.

 기둥간에는 화반(花盤)없이 굴도리 밑에 장여를

받고 있는 소로만을 끼워 간결한 장식을 하였다.

건물의 내부에는 좌우엔 온돌방과 중앙3칸은 마루를 깔았고,

전면 중앙의 2칸에만 툇마루를 창 없이 개방하였다.

 외진평주와 내진고주 사이에는 퇴량을 걸었고,

그 위로는 연등천장을 하고, 안쪽으로는 우물반자를 하였다.

대들보는 내진고주 사이에 걸리었다

 

 

 

 

 

 

영춘헌은 내전 건물이며 집복헌(集福軒)은 영춘헌의 서행각으로 초창 연대는 알 수 없다.

집복헌에서는 영조 11년(1735)에 사도세자가 태어났고 정조 14년(1790) 6월에는

 순조가 태어났으며 정조는 영춘헌에서 거처하다가 재위 24년(1800) 6월 승하하였다.

순조 30년(1830) 8월 1일 오전 화재가 발생하여 환경전, 경춘전등과

함께 소실되어 순조 34년 장남궁을 헐어다 그 재목으로 재건하였다.

1983년 동물사 본관에 있던 창경원 관리 사무소가 동물사의 철거로 인하여 이곳으로

옮겨 임시 관리 사무소로 사용되다가 1986년 중건 공사 때

창경궁 관리 사무소를 신축하고 이 건물은 변형된 부분을 보수하였다

영춘헌은 본채 5칸이 남향하여 ㅡ자형을 이루고 본채의 좌우와 뒷면으로는

행각이 둘러져 있어 ㅁ자형을 이루었으며 서쪽으로 ㅁ자형의 행각이 이어져 맞붙어 있다.

주위 건물과 비교해 볼 때 통명전, 경춘전, 환경전 등은 이익공식이고 양화당은

초익공식인 데 비하여 영춘헌은 기둥의 높이도 낮고 익공의 끝을 몰익공식으로

 둥글게 굴려 초각하였으며 행각은 더욱 간결하게

굴도리집으로 처리하여 각 건물의 격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