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여행] 화성행궁 #1

2011. 4. 3. 23:20전국 방방곡곡 여행지/경기도 여행지

 

 

화성행궁은 조선 후기 정치와 군사 및 사회문화의 변화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산이며,

 발굴조사 및 복원정비사업을 통해 조선시대 행궁의 모습을 재현할 수 있게 된 중요한 문화유적으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다.

  또한 정조시대 실학정신을 바탕으로 위민과 개혁을 실천하고자한 역사적 공간이자
혜경궁 홍씨의 회갑진찬연을 베풀었던 효의 상징적인 공간이며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의 중심축이다.

 

 

 

 

 

 

신풍루는 화성 행궁의 정문으로 1790(정조 14)에 누문 6칸을 세우고 진남루(鎭南樓)라고 하였다.
1795년 정조는 신풍루로 고치라고 명하여 조윤형으로 하여금 다시 편액을 쓰게 하였다.

'신풍'이란 이름은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또 하나의 고향' 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걸게 한 것이다.
1795년 을묘 행차시에 신풍루 앞에서는 정조가 친히 참석하여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굶주린 백성에게는 죽을 끊여 먹이는 진휼 행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행궁(行宮)은 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전란(戰亂), 휴양, 능원(陵園)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을 말하며 그 용도에 따라서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위급함을 피하고 국사(國事)를 계속 하기 위해 마련된 행궁으로는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 내의 광주부행궁 등이 있고, 온양행궁은 휴양을

목적으로 설치된 행궁으로 조선 세종이래 역대 왕이 즐겨 찾던 곳이다.
그리고 왕이 지방의 능원(陵園)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이 바로 화성행궁이라 할 수 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으로 이장하면서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으며

 1790년에서 1795년(정조 14∼19년)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참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하였다.

그 중에서도 화성행궁은 규모나 기능면에서 단연 으뜸으로 뽑히는 대표적인 행궁이라 할 수 있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부 유수(留守)가 집무하는 내아(內衙)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1789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년(정조 24년)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陵幸)을 거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純祖) 1년(1801) 행궁 옆에 화령전(華寧殿)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眞影)을 봉안 하였고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
화성행궁은 성곽과 더불어 단순한 건축 조형물이 아니라, 개혁적인 계몽군주 정조가

지향하던 왕권강화정책의 상징물로 정치적, 군사적인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서리청(西吏廳)

서리는 문서의 기록 및 수령, 발급을 담당하는 아전으로서

서리청은 그들이 사용하는 건물이다. 비장청 앞에 위치했으며 남향이다.
예전의 금도청(禁盜廳)건물을 이청으로 쓰게 하고, 그 건물을 증축하여 사용하였으며

1795년 을묘원행시에는 수라칸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비장청(裨將廳)

비장은 관찰사나 절도사등 지방관이 데리고 다니던 막료로 조선 후기에는

방어사를 겸한 수령까지 모두 비장을 거느리는 것을 관례화하여 민정 염탐을 시키기도 하였다.
비장청은 화성 유수부의 비장들이 사용하던 건물로 외정리도 앞에 있는 남향 건물이다.
원래는 1789년(정조 13)에 세웠는데 1796년(정조 20)에 서리청 건물을 수리하고 비장청으로 변경하여 사용하였다.

 

 

 

 

 

 

 

 

 

 

 

외정리소(外整理所)

정리소는 장차 1795년 을묘원행에서 펼쳐질 각종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1794년 12월에 설치한 임시 기관이었는데,

화성 성역이 끝난 후 외정리소라 하여 정조를 비롯한 역대 임금이 행차할 때 화성 행궁에서의 행사 준비를 담당하는 관청이 되었다.
처음에 정리소는 장용내영에 설치하였는데, 1796년(정조 20) 화성 행궁이 완성되면서

유여택 앞에 외정리소를 세우고 '외정리아문(外整理衙門)'이란 편액을 달았다.
외정리사는 호조판서가 겸임하는 것이 상례였으나 화성의 경우는 화성 유수가 겸직 하였다.

 

 

 

 

 

 

 

 

 

 

 

 

 

 

 

 

 

 

 

 

 

 

유여택은 평상시에 화성유수가 거처하다가 정조가 행차시에 잠시 머무르며 신하를 접견하는 건물이었다.
유여택은 복내당 동쪽 행각과 외정리소 사이에 있다.
유여택이라는 이름은 『시경』 중에서 주나라 천명을 받아 나라를 크게 하고 집을 주었다는 데서

 따온 것으로 정조의 입장에서는 화성 유수를 임명하여 내려보내는 곳이라는 의미가 된다.
원래 유여택은 1790년(정조 14)에 건립하고 은약헌(隱若軒)이라 하였다가,

 1796년(정조 20)에 증축하면서 유여택으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건물은 동향으로 왼쪽에 공신루(供宸樓) 1칸을 덧붙여 휴식 공간을 마련하였다.
1795년 행차시에 정조는 유여택에서 각종 행사에 대한 보고를 받고 하교를 내렸다.

 

 

 

 

 

 

 

 

 

 

유여택 앞쪽에 뒤주 체험시설입니다.

정조대왕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돌아가신것을 체험하는 뒤주입니다.

 

 

 

 

 

 

 

 

 

 

 

 

 

 

 

 

 

 

 

 

 

 

 

 

 

 

 

 

궁녀들의 신분에 따른 복장을 설명과 함께 전시하였습니다.

 

 

 

 

 

 

드라마 대장금 촬영을 이곳에서도 하였다고 합니다.

 

 

 

 

 

 

 

 

 

 

 

 

복내당은 행궁의 내당(內堂)으로 정조가 행차시에 머물렀던 곳이며 장락당 남쪽에 위치하였다.
상량문은 1796년(정조 20) 11월 민종현이 지었다.
복내당의 이름은 '복은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원래 복내당은 1790년(정조 14)에 수원부 신읍치소의 내아(內衙)로 건립하였고,

 1794년(정조 13)에 세웠다. 좌우 두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