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못성지

2011. 5. 11. 11:36카톨릭 이야기/천주교 성지순례

 갈매못성지 ~2

 

남 대천과 광천 중간 지점에 주포(周浦)가 있고 여기서 서해안을  향해 30리쯤 달리면 바다와 만나게 된다. 충청도 수영(水營)에서도 바닷가로 더 나가 광천만이 깊숙이 흘러 들어간 초입, 서해를 내다보며 자리한 순교 성지 갈매못. 한국 가톨릭 최고의 성지로 꼽을 만한 곳이다.
 
충남 보령군 오천면 영보리 바닷가에 있는 이 순교 성지는 서해안 지역에서 유일하게 개발돼 있는 성지라는 점에서 꼭 한번 순례해 볼 만한 곳이다. 특히 일몰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순교의 현장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갈매못은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 안 주교, 오매트르 신부, 위앵 민 신부, 황석두 루가, 장주기 회장 등 다섯 명과 5백여 명의 이름 모를 교우들이 순교한 곳이다. 1845년 조선 땅에 입국한 다블뤼 주교는 조선 교구 4대 교구장이었던 베르뇌 주교의 순교로 1866년 3월 7일 제5대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됐다가 4일 만인 11일 그의 복사였던 황석두 루가와 함께 내표 지방에서 체포됐다.
 
다블뤼 주교는 대원군과의 상면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그 후 신자들이 마구 잡혀 처형되자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스스로 체포될 것을 결심한 뒤 다른 동료 선교사들에게도 자수를 권유하는 편지를 보낸 후 붙잡혔다. 다블뤼 주교의 체포 소식을 들은 오메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도 자진해서 잡혀 서울로 압송됐다.
그러나 때마침 고종이 병을 앓게 되고 국혼(國婚)도 가까운 시기여서 조정에서는 서울에서 사람의 피를 흘리는 것은 좋지 못한 징조라 하여 이들을 250여 리 떨어진 보령수영(保寧水營)으로 옮겨 처형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이들 네 명은 갈매못으로 향하는 250리 죽음의 행진을 떠나게 됐는데 여기에 배론 신학당의 집주인 장주기가 합세, 모두 5명이 함께 자진해서 죽음을 향해 떠나갔다.
 
이들 세 성직자와 두 전교회장이 갈매못을 향해 가는 도중에 길목인 내포 땅 아산군 음봉면 길가의 바위 위에 걸터앉아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마지막 설교를 한 다음 성가를 부르며 끌려갔다는 대목은 장엄하기 까지 하다. 그 때 그 바위는 지난 1973년 음봉 삼거리에서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 광장으로 옮겨져서 '복자 바위'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으나 1984년 다섯 분 모두 성인품에 오른 후 '오성 바위'라고 고쳐 부르고 있다.
 
이들 5인의 순교 성인 중 황석두 루가 성인의 유해는 가족들이 거두어 연풍에 안장했고 나머지 네 분의 유해는 사흘 뒤 사형장 부근에 매장됐다가 홍산으로 옮겨졌고 브랑 신부에 의해 일본 나가사키로 이장, 다시 1900년에 명동 대성당, 1960년대에 시성 시복 운동이 전재되면서 절두산 순교성지에 안장됐다. 갈매못이 순교 성지로 눈길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1975년 9월 대전교구 대천 본당 주임이었던 정응택(요한) 신부가 순교 당시의 위치를 확인하고 순교복자 기념비를 세우면서부터이다. 그 후 1985년 9월에 다섯 분의 순교 성인 기념비와 야외 제단이 세워졌다.
 
갈매못에는 현재 전담 사제와 수녀가 상주하며 순례객들의 방문을 안내하고 있다[편집자주].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