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새남터순교성지

2011. 11. 18. 20:30카톨릭 이야기/천주교 성지순례

 

서울 새남터순교성지

 

새남터는 한국교회 역사상 순교한 성직자 14분 중 11분이 순교하였으며 이 11분 중 8분과 교회의 지도급 평신자 3분이 성인품에 오른 한국의 대표 순교성지이다. 조선인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 최초로 한국에 들어왔던 신부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 최초로 한국에 들어왔던 주교 앵베르 성인, ‘기해일기’ 의 현석문 가를로 성인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9분의 성인유해가 새남터에 모셔져 있다.

‘새남터’의 말뜻은 '새나무터'의 준말이다. '새나무'는 '풀과 나무'의 뜻이며, ‘새’ 라는 말은억새의 의미이다. 다시, ‘새남터’에 대해서 설명하려면 조선조 초기로 거슬러 올라 가야한다, 이 곳을 노들이라고 했는데, 지금의 노량진과 배로 왕래했던 나루터가 있는 곳이라는 의미이며, 새남터를 한자로 음역(音譯) 해서 사남기( 沙南基 )라고도 불렀는데,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숲이 울창한 곳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이 곳에 군사 훈련장으로 사용되다 국가에 대하여 중한 죄를 지은 사람(國事犯)을 처형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대표적으로 세조 2년, 1456년 단종을 다시 임금으로 올리려다 처형당한 성 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이 이 곳에서 피를 흘렸다.

새남터와 연결된 현 노량진에 있는 ‘아차고개’에 대한 일화가 있다, 사육신묘 마루터기에 있는 고개 이름인데, 이 고개는 조선 세조 때 영등포 이남에 살던 어떤 선비가 육신(六臣)을 처형함이 부당하다고 간청하기 위하여 도성을 향하여 말을 달려오다가 이 고개에 이르렀을 때 사육신이 이미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차! 늦었구나.'하고 한탄하던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이후 1801년부터 1866년까지 한국교회 4대 박해 기간 중 천주교 신자, 특히 사제들의 숭고한 피가 이곳에 뿌려져 너무나도 찬란한 신앙의 꽃을 한반도에 피우게 만들었다.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목자없이 스스로 신앙을 받아들여 교회를 세웠다. 이에 북경교구는 조선의 교우들을 위해 1795년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파견하게 되었다. 주문모 신부는 한양에 들어와 교세를 키웠으며 6년 만에 신자수가 6,000여명이나 늘어났다. 그러나 배교자의 밀고로 쫓기는 몸이 되었고, 당신을 위해 여러 사람이 희생되자 스스로 의금부를 찾았으며 결국 새남터에서 칼을 받고 장렬하게 순교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1801년 신유박해 때의 일로 새남터에 처음으로 순교의 피가 흘렀다.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1831년에는 북경교구로부터 독립하여 조선교구가 설립되었다. 이를 계기로 1836년과 1837년 사이에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아시아 지역에 대한 선교를 위하여 설립)의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엥베르 주교가 들어와 1년 동안 9,000여명의 신자를 늘리는 등 교세를 키웠으며,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소년을 마카오에 유학을 보내 한국 천주교의 뿌리를 키웠고, 신자들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치는 등 많을 일을 하였다.

그러나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면서 세 명의 외국인 사제는 새남터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된다. 헌종 5년의 일로 많은 신자들이 신앙을 지키려고 목숨을 잃었는데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간의 시벽파 싸움에 천주교 신자들이 희생 제물이 되었던 것이다.

1836년 모방신부에게서 세례를 받고 두 번이나 중국으로 넘나 들며, 수업을 하고 상해의 금가항 신학교에서 한국사람으로서는 최초로 신부가 되신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이 1846년 이곳 새남터에서 참수되었는데 기해박해 때 순교한 세분의 프랑스 신부에 대한 항의로 프랑스 군함 3대가 충청도 외면도에 들어와 조선 조정에 항의문으로 압박을 가하자 9월 16일 김대건 신부를 서둘러 처형하였다. 이것이 병오박해로 헌종 12년이었으며 3일 후 현석문도 처형하였다.

철종이 즉위하자 천주교를 박해하는 일이 없었다, 도리어 복돋아 주어 교세가 크게 확장 발전하게 되었다, 새 영세자도 많이 늘어났고, 천주교를 옹호하던 순원왕후가 철종의 정사를 뒤에서 맡아보게 되어 청나라로부터 많은 성직자들이 들어왔다. 이 결과 교우가 1850년에 일만 일천여명, 1855년 일만 사천여명을 헤아리게 되었고, 신학교까지 설립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20년 후에는 대원군이 수만 명의 천주교도를 죽이는 대학살의 비극이 일어났다. 러시아가 조정에 문호 개방을 요구하자,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 프랑스, 영국의 동맹을 결성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물리치자고 한 건의가 시기를 놓치고 오해를 발생시켜 1866년 고종 3년에 시작되어 1873년까지 천주교도에 대한 대학살이 있었던 것이다.

새남터에서는 베르뇌 주교성인과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등 사제성인, 푸르티에 및 프티니콜라 신부, 그리고 성 정의배 마르꼬, 성 우세영 알렉시오가 순교의 피를 흘렸다.

조선시대에 새남터의 저녁풍경은 돌아가신 영혼들의 피 때문인지 ‘용산 8경’의 하나로 손 꼽힐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한다. 다른 성지와 다른 점이 새남터는 사제들의 순교지라는 것이며,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성인이 군문효수형을 당한 바로 그 장소라는 의미에서 한국 천주교에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망나니들의 칼춤과 북소리에 슬픔을 감추지 못했던 하늘이 천둥소리로 대답했던 곳, 새남터의 북소리가 그칠 줄을 몰랐기 때문에, 오늘날의 한국 천주교회가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지금은 아파트가 밀집해 있고 열차 다니는 소리로 요란하지만 묘하게도 새남터성지 안에만 들어서면 이 모든 소리가 고요로 가라앉는 것 같다고들 한다. 한강 둔치와 이어져 있어 차분한 마음으로 산책하면서 바라보는 강도 그럴싸하고 이곳에서 보는 황혼이 왜 유독 아름다운지 깨닫게 해 주는 곳이다.

새남터 형장의 본래 위치는 서부 이촌동 아파트 인근으로,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1890년부터 이곳 순교터를 매입하고자 하였으나 경부선 공사로 인해 실패하였고, 1956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본래의 순교터보다 북쪽으로 500보 남짓 되는 곳(현 용산구 이촌 2동)에 현양비를 세울 수 있었다.

새남터 성지는 1950년에 순교기념지로 지정되었고, 1956년에 ‘가톨릭 순교성지’ 라는 기념탑이 세워졌다,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서 관리, 운영하고 있으며, ‘복자학교’라는 교육 시설을 운영하다가 1981년에 한강본당으로부터 분가하여 본당으로 설정되었다.

국철을 타고 한강철교를 건너다보면 대교 북단 서쪽으로 한국식의 뾰족한 종탑이 있는 3 층 기와건물을 볼 수 있다. 현재 명지대 건축학 교수로 계신 박태연씨가 설계한 이 건물은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서 수도회의 자산을 정리해 1987년에 완공한 순교기념성전이다.

현재 새남터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 성 베르뇌 주교, 성 브르트니에르 신부, 성 볼리외 신부, 성 도리 신부, 성 우세영 알렉시오 등 9분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홈페이지~http://www.saenamteo.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