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문화재 탐방] 국가 사적 제399호 ‘양화나루·잠두봉 유적’

2011. 11. 24. 20:00전국 문화재와 박물관/국가지정 문화재

 

[서울 문화재 탐방] 국가 사적 제399호 ‘양화나루·잠두봉 유적’

 

조선조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절두산의 옛 이름이 가을두(加乙頭) 라고 전해지고 있다. 한강변의 명승지로 그 풍경이 뛰어나서 문인들의 발길이 잦았고 중국 사신들이 오면 빼놓지 않고 다녀갔을 만큼 경치가 아름다웠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곳이 병인년(1866년) 천주교 박해(병인박해)로 수 많은 신자들이 목이 잘리어 숨진 뒤 절두산(切頭山:머리가 잘림)이라는 지명을 얻게 되었다. 이렇듯 역사의 흔적들을 그대로 간직한 절두산에 기념관을 세워 그 당시의 사회와 문화와 그시대를 살던 선조들의 삶을 느낄 수 있는 많은 유물과 자료들을 보관, 전시하고 있다.
기념관의 설계는 산의 모양을 조금도 변형시키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공모하여 서울대 미대 교수인 이희태(李喜泰)씨의 설계가 채택되었다. 기념관은 순교정신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면서 한국적인 토착성과 전통적인 고유미를 살리는 데 역점을 두어 설계되었다. 궁궐의 기둥과 같은 화랑의 원주, 옛 초가집 지붕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미끄러져 내린 추녀, 조상들이 쓰던 갓 모양을 하고 있는 성당의 천개, 이런 하나 하나가 우리에게 옛 정취와 포근한 정감을 일으키고 있다. 또한 성당의 평면은 부채살형으로써 초점인 제단에서의 성찬과 말씀이 반사되어 바깥 세계로 퍼져 나가 모든 인간에게 전해지는 이미지가 내포되어 있다.
이렇듯 건물 설계자체뿐 아니라 건물 주변 곳곳은 어느 하나라도 놓칠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

홈페이지~http://www.jeoldusan.or.kr/

 

 

 

 

 

절두산 순교 기념관은 병인 순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1966년 3월에 착공하여 1967년 10월 낙성되었다. 절두산의 지세와 한강변을 활용하여 자연 속에서의 조화미를 얻은 본 기념관은 교회사적 뿐 아니라 문화사적으로도 중요한 의의가 있다.
기념관은 건물 3층(총 325평)과 종탑(35평), 성당(99평)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곳이 병인년(1866년) 흥선대원군의 선참후계(先斬後啓)의 명으로 시작된 천주교 박해로 수 많은 신자들이 목이 잘리어 숨진 뒤 절두산(切頭山:머리가 잘림)이라는 지명을 얻게 되었다. 이렇듯 역사의 흔적들을 그대로 간직한 절두산에 기념관을 세워 그 당시의 사회와 문화와 그시대를 살던 선조들의 삶을 느낄 수 있는 많은 유물과 자료들을 보관, 전시하고 있다.

 

 

 

 

 

기념관의 설계는 산의 모양을 조금도 변형시키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공모하여 서울대 미대 교수인 이희태(李喜泰)씨의 설계가 채택되었다. 이 건축설계도는 순교정신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면서 한국적인 토착성과 전통적인 고유미를 살리는 데 역점을 두어 설계되었다. 후에 이 설계도는 세계 건축 설계 콘테스트에 출품되어 은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궁궐의 기둥과 같은 화랑의 원주, 옛 초가집 지붕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미끄러져 내린 추녀, 조상들이 쓰던 갓 모양을 하고 있는 성당의 천개, 이런 하나 하나가 우리에게 옛 정취와 포근한 정감을 일으키고 있다. 또한 성당의 평면은 부채살형으로써 초점인 제단에서의 성찬과 말씀이 반사되어 바깥 세계로 퍼져 나가 모든 인간에게 전해지는 이미지가 내포되어 있다.
기념관의 미술 분야는 서울대 미대의 김세중(金世中)교수가 맡고 직접 종탑의 순교자상과 대리석 제대, 성당 내부의 공간 처리되어 있는 십자가, 성체 감실 등을 제작하였다. 이렇듯 건물 설계자체뿐 아니라 건물 주변 곳곳은 어느 하나라도 놓칠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 본 기념관 2, 3층은 교회사 관련 유물과 문헌자료를 비롯한 민속품들이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기념 성당지하에는 성인 28위의 유해를 모시고 있어 한국의 그리스도의 복음화 과정을 보고, 느끼기 위해 외국의 많은 관람객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지금은 공사 중인 관계로 야외 전시장의 활용이 어려운 편이지만 올 8월에 공사가 완공될 예정이어서 한강변 녹지조성으로 교회사적인 유적지의 의미들과 함께 더 나아가 마포구의 새로운 문화의 공간과 휴식의 공간이 되리라 본다.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인물과 관련된 야외 전시물이 전시되어 있다. 우선 선조 신앙인들이 자신을 의탁하고 시련을 참아내고 순교로 신앙을 지킨 것을 높이 기리기 위해 루르드 마사비엘을 본딴 성모동굴을 조성했다. 성모 동상을 조성한 가장 중요한 뜻은 박해시대의 우리 신앙 선조들이 성모께 자신을 의탁하고 성모님의 보호하심으로 혹독한 시련을 참아 받고 마침내 순교하기까지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을 높이 기리는 데에 있었다. 1831년 조선 교구가 설정되고 난 뒤에 제 2대 교구장이던 앵베르 주교가 조선의 주보를 마리아로 바꾸어 줄 것을 교황청에 요청하였는데 성인 앵베르 주교가 순교하던 1839년 교황은 조선의 주보를 성모 마리아로 결정하였다.
절두산 성모 동굴은 1858년 3월 25일 성모님이 프랑스 남쪽 루르드의 동굴 마사비엘에서 발현하셔서 당신이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마사비엘을 본딴 동굴을 만들었다.

 

 

 

 

 

 

성 김대건 신부의 성화를 의뢰하면서 고증 작업이 시작되었고, 과학적으로 실측 조사한 수치와 균형에 의하여 김대건 신부의 성화가 그려지게 되었다. 동상은 김대건 신부 탄생 150주년 맞아 기념 제작된 것으로, '애국선열조상 건립위원회‘가 건립한 것으로 홍익대 전뢰진 교수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1972년 김수환 추기경의 축성과 함께 제막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동상은 뒤에 가톨릭 대학교로 이전되었으며, 그 자리에 지금의 동상이 자리하게 되었다.
좌대 높이 5.8m, 본상 높이 4.35m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다│

대건로의 지하 차도 공사가 진행 중일 때 교회로부터 문화재 신청을 받은 문화재 당국은 그 안건을 문화재 위원회에 상정하여 논의하였다. 사적 주무 분과인 문화재 위원회 제3 분과는 신중한 논의를 거듭하는 한편 실제로 현장을 답사하여 상황을 확인한 후, 마침내 절두산 성지 일대를 국가 유적으로 지정하기로 결정하였다. 다만 사적 명칭을 교회가 바라던 ‘절두산 성지’가 아니라 ‘양화나루·잠두봉’으로 지정하였는데, 그 이유는 “문화재의 보존 관리 및 활용은 원상 유지를 기본 원칙으로 한다”라는 문화재 보호법 제1장 총칙 제2조 2항에 제시된 문화재 보호의 기본 원칙을 따랐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절두산이라는 명칭은 잠두봉의 원 명칭이 아니다. 그 명칭은 한국 천주교 현양회가 병인박해 때 순교한 천주교도의 신앙을 현양하기 위해 잠두봉 일대 1,381평을 구입할 당시, 병인박해 때 이곳에서 수많은 천주교도가 참수형으로 목 잘려 죽은 곳이라 하여 “절두산”이라고 불러왔다는 지역 주민들의 말에 따라 잠두봉을 절두산으로 부르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 즉 교회측에서 붙인 신앙적인 호칭일 뿐 실제 명칭은 아니었다. 그러기에 “원상태로 보존한다”라는 문화재법의 원칙에 따라 위원회에서는 심의를 거쳐 절두산이 아닌 잠두봉으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한편 용두봉이라는 옛 기록도 있지만, 《조선왕조실록》과 서울 고지도에 잠두봉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것이 더 많다는 사실에 의거하여 잠두봉을 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 양화진이 아니라 ‘양화나루’로 정하게 된 이유는 한자식 기록에는 양화진(楊花津)으로 쓰이나, 당시의 조선 사람들은 순 우리말 표현인 양화나루로 불러왔기에 지명의 원 명칭을 보전하려는 이유에서 취해진 조치였다. 아울러 양화나루·잠두봉 유적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은 ‘절두산 성지’라는 이름으로 특정 교단의 역사 유적으로 한정하지 않고, 민족사의 사적이며, 민족의 문화재라는 넓은 역사 의식을 담고자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편 절두산 일대의 사적이라면, 양화나루와 잠두봉 이외에 군진 지역인 양화진(楊花鎭)과 외국인 묘지까지 포함시키자는 소수 의견도 제기된 바 있었다. 그러나 지정 신청자인 교회측이 성지 절두산 일원만을 신청하였기에 이 지역은 제외되었고, 문화재 위원회에서도 강변북로로 인해 절두산 지역과 군진 지역이 두 부분으로 나뉘었고, 두 지역의 관리자 역시 다르기 때문에 지정 후 관리 체제상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뒷날 필요하다면 별도로 지정할 수도 있다는 다수 의견을 받아들였다. 결국 최종적으로 절두산 일원의 사적만을 일괄하여 ‘양화나루·잠두봉 유적’이라는 이름으로 국가 사적으로 지정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97년 11월 7일, 유서 깊은 양화나루·잠두봉 유적이 문화재법에 의거하여 문화재 위원회에서 국가 사적 제399호로 공고되었다(지정 면적 11,857㎡). 이곳은 교회 문화재 가운데 성당을 제외하고 유적지 자체가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유일한 곳이다. 해 돋는 아침이면 유난히 영롱한 빛으로 비치는 절두산 성당과 당당하고 기품을 갖춘 절두산의 조화는 이제 한강의 명소로 손꼽히고 있다. 그러나 비 오는 날이면 금세 물 속에 잠긴 듯 처연한 모습을 보이며 선혈이 낭자한 피의 현장을 떠올리게도 하는 이곳은 한국 천주교인들이 진리를 증거하고 순교한 교회사의 순교 성지일 뿐만 아니라 우리 겨레의 역사의 현장으로서 길이 보존해야 할 귀중한 문화재이다.

 


 

 

1866년 병인박해로 로즈 제독이 프랑스 함대를 이끌고 1866년 9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침입을 하였는데, 당시 조선은 신앙의 자유는 없었지만 프랑스에서 입국한 선교사들에 의해 천주교가 전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집권자들은 교통과 군사의 주요한 땅인 양화진이 서양의 세력에 의해 더렵혀진 것이 천주교인들 때문이니 천주교인들의 피로써 오욕을 씻고자 이곳을 천주교인들의 사형 집행지로 택하였다. 1866년 10월 22일 황해도 사람으로 시흥 봉천동에서 잡혀온 이의송(프란치스코)과 그의 아내 김엇분(마리아), 아들 붕익(바오로)이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병인박해의 순교지인 “절두산 치명터를 확보하자”는 호소문을 발표하면서 각계각층의 협조와 관심을 구하던 한국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가 1956년 11월에 마침내 양화진 순교지를 매입하게 되었다.


 

 

 

 

 

 

 

척화비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 이후 대원군은 1871년 4월 서울의 종로 네거리를 비롯하여 전국의 중요 도시에 척화비를 세우게 되었다. 척화비에는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서양 오랑캐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음은 곧 화의하는 것이요, 화의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고 쓰여있다.
현재 절두산에 있는 것은 모조품이다.

 

 

 

 

 

 

 

 

 

 

[ 찾아가는 길 ]

절두산은 서울지하철 2호선과 5호선 합정역에서 10여분 거리로 가깝다.

승용차로는 강변북로로 들어간다. 마포대교에서 양화대교 못 미쳐 안내판이 있다.

 성산대교 방향에서 길을 찾을 때는 양화대교 아래에서 합정동 방향으로 좌회전하면 안내 간판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