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1. 28. 06:30ㆍ전국 문화재와 박물관/국가지정 문화재
[서울역사탐방]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정부수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와 선열들의 자주독립정신을
배울 수 있는 역사 교육의 장으로 삼고자 1995년 공사를 시작하여 1998년 11월 개관하였다.
서대문독립공원 내에 있으며 3·1운동 직후 유관순 열사가 투옥되어 숨을 거둔
지하 옥사와 감시탑, 고문실, 사형장, 옥사 7개동, 역사전시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관사와 고문실로 쓰이던 역사전시관에는 영상자료실, 강우규 의사의 의거를 재현한
매직비전, 형무소역사실, 관람객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벽관·독방 등의 옥중생활실 등이 있다.
이밖에 사형장 옆에 시신을 몰래 버리기 위해 만든 시구문이 복원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제국은 본격적 침략의 일환으로 이에 저항하는 한국의 애국지사들을 투옥하기 위하여 융희(隆熙) 원년(1907년) 감옥을 건축하였다. 일본인에게 설계를 맡겨 500여명의 기결수(旣決囚)를 수용할 수 있는 560여평의 목조건물을 지었다. 이때 전국의 감옥 총면적이 1,000제곱미터였는데, 새로 지은 감옥의 규모는 전체 감옥면적의 두 배가 넘었다. 1908년 10월 21일, 500년간 사용된 종로(鐘路)의 전옥서(典獄署)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기결수를 옮겨와 경성감옥(京城監獄)이라 하였다. 한국의 독립 운동가들을 많이 투옥하면서 수용할 공간이 부족하자 1912년에 현재의 서울 마포구 공덕동 자리에 다른 감옥을 짓고 경성감옥이라고 이름을 붙이면서 9월 3일 구(舊) 경성감옥을 서대문감옥으로 개칭하였다. 1918년부터 서대문감옥은 형무관(刑務官)을 양성하는 곳도 겸하게 되었다.
105인 사건을 시작으로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대규모로 수감되기 시작하였다. 1919년 삼일운동이 발생하였을 때 수감자의 수가 폭증했는데, 손병희와 유관순을 포함한 3,000명의 조선인이 한꺼번에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되었다.
1923년 5월 5일에는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로 개칭하였다. 서대문형무소는 1935년에 미결수(未決囚)를 구금하는 구치감(拘置監) 시설도 갖추었는데, 광복 직전인 1944년에는 2,890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일제 때 이 곳은 여느 감옥과는 달리 18세 미만의 한국 소녀수(少女囚)를 모두 수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3․1운동 때 유관순 열사도 구금되어 악형(惡刑)에 시달린 끝에 순국하였고, 전국의 10년 이상이나 무기형(無期刑)을 언도 받은 기결수가 수감되어 있었던 점도 특색이었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을 비롯하여 수많은 애국시민과 학생들이 이곳에 투옥되었다.
광복 이후
광복 이후 대한민국이 주권을 가지게 되면서 형무소를 대한민국 정부가 쓰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름이 1945년 11월 21일 서울형무소로 바뀌었는데, 이 시기에는 반민족행위자(反民族行爲者)와 친일세력들이 대거 수용되었다. 또한 좌익계열의 인사들도 체포되어 수감되었는데, 김원봉, 김성숙도 수감된 적이 있으며, 여운형도 수감된 적이 있었다. 1950년대에는 수감자의 70퍼센트가 좌인인사들이었다. 1961년 12월 23일에 서울교도소로 개칭되었다가 1967년 7월 7일에 서울구치소로 바뀌는 기간 동안에는 4․19혁명과 5․16군사정변 등과 같은 정치적 변동에 따라 많은 시국사범들이 수감되기도 했다. 국회부의장을 지낸 조봉암과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도 이곳에서 사형을 당하였으며, 1975년 인혁당사건으로 사법살인을 당한 도예종 등 8명도 이곳에서 사형당하였다.
1987년에 서울구치소가 의왕으로 옮겨질 때까지 형무소의 역할을 계속했다.
이전 이후
도시가 발달함에 따라 서울구치소가 도심에 있는 것이 부적합하다고 하여, 1986년에 이전 계획을 수립하고 1987년 11월 15일에 경기도 의왕시(義王市)로 옮겼다. 당시 옥사(獄舍)는 모두 15개동이 있었으나 역사성과 보존 가치를 고려하여 제9ㆍ10ㆍ11ㆍ12ㆍ13옥사와 중앙사, 나병사(癩病舍)를 보존하였다. 1988년 2월 20일, 그 중에서 김구(金九), 강우규(姜宇奎), 유관순 등이 옥고를 치른 제10ㆍ11ㆍ12사의 감옥건물과 사형장이 사적 제324호로 지정되었다. 1988년부터 공원조성공사를 시작하여 1992년 8월 15일 제47주년 광복절을 맞아 ‘서대문독립공원’으로 개원하였다. 1995년에는 정부수립 50주년 기념으로 망루와 시구문 등을 원형대로 복원하고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의 공사를 진행하는 등, 서대문독립공원 사적지에 대한 성역화사업에 착수했다. 1998년 11월 5일에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개관했다.
매주 월요일과 신정(1월 1일), 설날, 추석을 제외하곤 상시 개방하는데,
하절기(3월~10월)에는 오전 9시 30분부터 저녁 6시까지,
동절기(11월~2월)에는 오전 9시 30분부터 저녁 5시까지 개방하고 있다.
입장료는 성인 1,500원, 1,000원, 어린이 500원이다.
일제의 물고문
벽관고문
옴짝달싹할 수도 없이 좁은 공간에 사람을 감금하여 앉을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고통을 주었던, 고문도구. 벽에 서 있는 관이라 하여 '벽관'이라 이름 붙여졌다.
12옥사 먹방
이곳은 12옥사 내부에 설치되었던 독방으로 한 사람이 겨우 눙울 수 있는 약 2.4㎡의 공간이다.
내부는 24시간 내내 빛이 한줌도 들어오지 않아 마치 먹물처럼 깜깜하다 하여 일명 '먹방' 이라 불렀다.
또한 마룻바닥 끝부분에 구멍을 내어 용변을 밖으로 처리하게 하는 등 외부와 철저히 격리된 공간이었다.
이곳에 감금되면 정신공황 장애를 겪기도 하는 등 상상 이상의 고통이 뒤따랐다.
사각연못
일제강점기에 재소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기위한 나전칠기공장이 있었던 자리로
해방후에는 빨래터로 사용하기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안산에서 내려온 물이 고였다가 흘러나가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통곡의 미루나무
이 미루나무는 1923년 사형장 건립 당시 식재되었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애국지사들이 마지막으로 이나무를 붙잡고
조국의 독립으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해야 하는 원통함을 눈물로 토해내며 통곡했다고 하여
'통곡의 미루나무'라고 이름 지어졌다.한편, 사형장 안쪽에 같은 시기 식재된 미루나무가 있으나,
너무나 억울한 한이 많이 서려 잘 자라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사형장
시구문
이곳은 일제감정기에 사형 집행 후 그 사실을 은폐해야 할 경우 시신을 외부로 몰래 반출하기 위해 뚫어 놓은 비밀 통로이다.
고문 등으로 그 흔적이 많은 경우, 사형 사실을 외부에 공개했을 때 사회적으로 파장이 우려되는 경우,
시신을 인도할 유족이 없는 경우등에 이용되었다. 원래 길이는 약 200m로 바깥가 연결되었으나 해방 직전 일제가 붕괴시켰다.
이것을 지난 1992년 독립공원 조성시 발굴하여 약 40m를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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