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2. 15. 06:30ㆍ전국 방방곡곡 여행지/경기도 여행지
[인천여행] 인천상륙작전기념관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은 6·25 전쟁 때 연합군 상륙작전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기념관으로, 인천광역시 연수구 옥련동에 있다.
1950년 공산세력의 불법 침략으로 위기에 놓인 대한민국을 UN의 깃발아래
목숨을 바쳐 자유 민주주의를 지켜낸 우방국가 젊은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영원히 기리고 그 뜻을 소중히 하기 위하여
6. 25전쟁 당시 전세의 역전에 결정적 계기가 된
인천상륙작전이 있었던 이곳에
1984년 온 시민의 정성으로 건립되었다
인천상륙작전이란?
1950년 6. 25전쟁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초기의 수세에서 벗어나 반격을 시작하는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상륙작전으로 전쟁초기 기습공격과 엄청난 전투력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진격한 북한군은 UN군의 참전과 국군의 반격으로 더 이상 진출하지 못하고 교착상태에 빠진다. 이때 맥아더장군은 낙동강전선에서 위기를 타개하고 북한군의 배후를 강타한다는 내용의 작전구상을 실천에 옮기게 된다. 이 계획은 맥아더장군이 6월 29일 한강방어선을 시찰할 무렵 구상되었던 작전으로 미지상군을 수원부근에 투입하여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면서 미 제1기병사단을 인천으로 상륙작전을 실시하여 북한군을 포위 격멸하려는 블루하트(Blue heart) 계획이 수립되었으나 북한군의 남진을 막지 못해 상륙부대는 내정하였던 미 제1기병사단을 전선에 투입하게 되므로써 이 계획을 취소하게 된다. |
이후 계속적으로 연구 발전시켜 「계획 100-B(인천)」, 「계획 100-C(군산)」, 「계획 100-D(주문진)」의 3개안 중 낙동강에서 반격을 취한다는 「계획 100-B(인천)」가 채택되어 9월15일을 예정으로 한 크로마이트(Chromite) 작전계획이 수립되었다.
상륙예정지인 인천은 서울에서 서쪽으로 32Km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서울로 접근할 수 있는 최단거리 항구이고 , 수도 서울을 탈환함으로써 적에게 심리적으로 타격을 가 할 수 있는 한편, 남한 깊숙이 투입된 북한군의 보급선을 차단할 수 있으며, 동시에 낙동강 전선에서 총반격을 실시함으로 북한군 주력을 압축 섬멸함으로써 소수의 희생으로 다대한 성과를 획득 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 작전이 시행될 인천항은 많은 난점을 안고 있었다. 즉, 인천항에 이르는 수로는 좁은 단일수로로서 대규모 함정의 진입이 불가능하고, 적이 기뢰를 매설할 시 많은 피해가 예상되며, 조수간만의 차가 10m내외로 심하고, 지형 등 자연적인 불리한 조건과 병력, 탄약, 보급품의 운송 등 작전을 지원하기에 많은 어려움이 따라 합동참모본부와 해군은 반대 의견을 제시하였고, 대안으로 군산이나 아산만 해안의 포승면 일대로 상륙지점의 변경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적은 후방을 무시하고 있고, 병참선이 과도하게 신장되어 있으므로 서울에서 신속히 이를 차단 할 수 있으며, 그들의 전투부대는 사실상 낙동강 일대의 제8군 정면에 투입되어 훈련된 예비 병력마저 없어, 전세를 회복할 능력이 거의 없다”라고 설명하였고, 전략적, 심리적, 정치적인 이유를 들어 중요한 수도 서울을 단 시일 내 탈환하기 위해서는 인천에 상륙해야 한다는 맥아더 장군의 결단으로 합동참모본부는 8월 28일 「크로마이트(Chromite)작전계획」을 승인 하였다.
이 계획에 의거 편성된 상륙부대로 미 제10군단을 창설하여 군단장에는 알몬드 소장을 임명하고, 예하에 미 제1해병대 사단(사단장 스미스 소장)과 미 제7사단(사단장 바 소장), 국군해병연대(사령관 신현준 대령), 국군 제17연대 (연대장 백인엽 대령)등 총 병력 75,000여명으로 편성하였고, 이들의 임무는 인천항의 확보와 해안교두보 점령, 가능한 한 신속히 진출하여 김포비행장 확보, 한강도하 및 서울 탈환, 미 제8군단과 연결작전이 이루어지기까지 서울 근교의 진지 점령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상륙지역을 고립시키기 위한 공중폭격이 9월 4일부터, 9월15일까지 계속되었고, 9월13일부터는 4척의 항공모함과, 6척의 구축함, 5척의 순양함이 인천만 어구에 들어서 월미도를 포격하기 시작 하였으며, 9월 12일에는 군산에 양동작전을 감행하였고, 동해안에는 9월14일 ,15일 양일간에 걸쳐 삼척일대 포격을 가하기도 하였다.
당시 북한군의 인천지역 병력규모는 지역 경비대대를 포함하여 약 2,000여명에 달하였고, 서울-인천 지역에서 활동 중인 적의 병력은 약 10,000여명으로 판단되었다.
9월15일 새벽, 제7합동기동부대 스트러블 해군제독의 지휘아래 항공모함, 구축함, 순양함 등 8개국 261척(미국225, 영국12, 캐나다3, 호주2, 뉴질랜드2, 네덜란드1, 프랑스1, 한국15)의 함정과 제10군단으로 편성된 대규모선단이 인천앞바다에 집결하였고 월미도에 상륙 돌격을 감행할 미 제5해병연대 제3대대 상륙단의 선견공격대가 인천수로에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 해군정보장교 클라크대위가 밝혀주는 팔미도 등대의 안내를 받아 무사히 인천항에 이르렀다
05:00부터 공격준비 사격에 이어 상륙주정(LCVP)20척에 분승하여 인천상륙을 감행하여 제1파 7척이 예정보다 3분이 늦은 06:33에 녹색해안(Green Beach)인 월미도에 상륙, 연이어 후속파가 도착하였다. 이어 월미도 정상의 105고지를 향하여 공격을 개시하였고, 일부는 인천 내륙으로 이어지는 방파제에 도착하여 그 일대를 차단하였다. 06:55에는 105고지 정상을 탈환하였고, 08:00 월미도를 확보한 후 소탕작전으로 들어가 정오쯤 완료하였다. 월미도 상륙 시 미 해병대의 총 피해는 부상자 17명이었으며, 적 사살 108명, 포로136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날 오후 만조가 되면서 적색해안(Red Beach), 청색해안(Blue Beach)에 상륙할 미 해병대 제1연대, 제5연대 전투단 병력을 태운 함정들이 인천항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우중에도 불구하고 미 해병대 및 해군 항공기는 인천 및 경인 국도를 연결하는 내륙지역에 대한 도로와 목표물에 대하여 계속하여 차단 공격을 가하였고, 해군 함포지원전대가 맹렬히 포격을 가하는 동안 돌격상륙부대인 미 제5해병연대와 국군 해병대 제1연대 제3대대는 적색해안을, 미 제1해병 연대는 청색해안을 향해 돌격하였다.
17:33 미 제5해병연대는 적색해안(동구 만석동 부근)에 상륙하였다. 계획된 시간보다 3분이 늦은 시간이었다. 상륙한 병력은 미리 준비한 사다리를 타고 방파제를 올라갔으며 일부는 해군 포격으로 파괴된 방파제 사이로 상륙하였다. 상륙지역 북측으로 상륙한 해병대는 해벽 후면의 적과 교전하여 8명이 전사하고 28명이 부상하였다.
한편, 청색해안(남구 용현5동)의 미 해병대 제1연대는 예정시간 보다 2분이 늦은 17:32분에 상륙을 시작하였으며, 대부분의 병력들은 높은 해벽을 기어오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행히 청색해안은 적의 저항이 없었기 때문에 큰 피해는 없었고, 공격목표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국군 해병대 제1연대는 15일 20:00에 적색해안에 상륙하여 시가지 소탕전과 외곽 경비를 담당하였다. 이날 작전에서 돌격 상륙부대의 피해는 전사 21명, 실종 1명, 부상 174명이었고, 인천에 상륙한 병력은 약 13,000여명이었다. 인천해안교두보를 확보한 미 해병대 제1사단은 9월16일부터 한강으로 진격을 개시하였다. 9월 18일부터 후속부대인 미 제7사단과 국군 제17연대가 상륙하여 서울 수복과 적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하였고, 9월27일 한국해병대가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한 후 소탕전을 전개하여 9월 28일 수도 서울은 90일만에 수복되었고, 인천상륙작전은 한반도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한 역사적인 작전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6. 25전쟁이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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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5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민주. 공산이념의 대결이라는 냉전체제 속에서 소련과 중공의 지원을 받은 북한의 김일성이 대한민국을 공산화할 목적으로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기습남침을 자행함으로써 일어났다. 전쟁 초기 북한군은 우세한 군사력으로 개전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두 달도 채 안되어 낙동강까지 남진하였다. 그러나 우리 국군은 군사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온 국민과 함께 총력전으로 공산 침략군에 대항하여 싸웠다. 유엔은 북한의 불법남침을 응징하기 위해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안을 결의했고, 이에 따라 21개국이 유엔의 깃발아래 한국을 지원함으로써 우리는 공산침략군을 격퇴하고 조국과 자유를 수호할 수 있었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 1개월간의 6. 25전쟁은 종전이 아닌 휴전의 상태로 남게 되었다 |
북한은 광복 이후 군사력을 대대적으로 증강하는 한편 남침에 유리한 기회를 조성하기 위해 각종 폭동과 도발을 자행해 민심을 교란시키는 등 만행을 자행하여 왔다. 이후 전쟁 준비를 완료한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소련제 T-34전차를 앞세우고 38도선을 넘어 기습남침을 감행하였다. 북한군의 기습남침에 맞서 국군은 육탄전으로 저항하였으나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된다. 6월 27일 유엔의 신속한 결의에 따라 유엔군의 파견을 결정하였고, 이에 따라 7월 3일 미군을 투입하였으나 북한군에 밀려 낙동강방어선까지 밀려가게 된다. 전력을 재정비 한국군과 미군은 낙동강을 최후의 저지선으로 정하고 결사적으로 방어하는 한편 반격을 위한 준비를 갖추었다.
9월 15일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의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되었고, 이 작전의 성공으로 적의 후방을 차단함으로써 낙동강전선에서는 반격을 취하는 등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승기를 잡은 국군과 유엔군은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였고, 10월 1일에는 38도선을 돌파한 후 계속 북진하여 10월 19일에는 평양을 탈환하고, 10월 26일에는 초산지역의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또한 중동부 전선에서는 유엔군과 한국군 제3사단이 압록강 상류 혜산진까지 도달함으로써 통일을 눈앞에 두었으나 예기치 못한 중공군의 불법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작전상 후퇴를 하게 됨으로써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이 공산군의 치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다시 탈환하는 등 과정을 겪으면서 38도선 부근에서 밀고 밀리는 양상으로 치닫게 된다.
1951년 봄,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가 실패로 돌아가자 공산군 측은 소련을 통해 휴전을 제의해옴에 따라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최초의 휴전회담이 열리면서 한쪽에서는 전쟁, 한쪽에서는 협상이라는 양상을 띠게 되었고, 전선은 휴전선 부근에서 머무른 채 전투는 2년여에 걸쳐 치열한 고지 쟁탈전으로 변하였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 1개월간의 6. 25전쟁은 종식되었으며, 수많은 인명피해와 막대한 재산피해를 남기고 종전이 아닌 휴전의 상태로 민족의 분단을 고착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채 현재에 이르게 된다.
당시 중공군의 복장과 무기류
맥아더장군 (1880. - 1964.)
맥아더 장군은 1880년 1월 26일 미국 아칸소에서 태어나 1903년 웨스트포인트의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10년동안 부관과 하급부대 장교를 지내고 이어 4년을 일반참모로 근무했다.
1917 - 1919년에 제42사단의 참모진에 배속된 맥아더장군은 제1차세계대전의 프랑스 전투와 라인지구 점령군의 전투에 참여하면서 참모장, 여단장, 사단장 등으로 직책을 바꾸며 활약했다.
1920대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재임하면서 광범위한 개혁을 실시하였고 1930년 미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었으며, 1937년 육군 대장으로 퇴역하였으나 1941년 현역으로 복귀하여 제2차세계대전시 남서태평양 지역 연합군사령관으로 태평양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1950년 6. 25전쟁시에는 유엔군사령관으로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하여 서울을 탈환하고 북한의 침략을 물리쳤다.
손원일 해군 제독(1908 - 1980)
손원일 해군제독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을 지낸 손정도 선생의 장남으로 태어나 중국난징중앙대학 항해과를 졸업하고 1930년 상해독립단체의 비밀연락원으로 입국했다가 체포되어 이듬해 풀려나 중국으로 갔다가 광복 후 귀국하였다.
1945년 11월 대한민국 해군의 모태가 되는 ‘해방병단’을 창설, 초대 단장에 취임하여 1946년 해안경비대 교장과 총사령관을 지내고 1947년 초대 해군참모총장으로 입명되었으며, 1950년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도와 서울 탈환에 앞장서 빛나는 전공을 세웠다.
그 뒤 1952년 해군중장으로 예편하여 제5대 국방부장관을 지내고 1957년 초대 독일대사를 역임하였다.
신현준 장군 (1915. - 2007년 10월 15일)
해병대 신현준 장군은 1915년 10월 23일 경북 금릉에서 태어나 1928년 하얼빈 보통학교에서 소학교 과정을 마치고 만주 군관 학교를 졸업하여 1946년 6월 22일 진해에 있는 조선해안경비대 총사령부에 입대. 총사령관 손원일 소령에 의해 행사에 참가할 제방지휘관으로 발탁되어 임시 중위계급을 부여 받는다. 이후 12월 해군중위로 정식 임관된다.
그 뒤 1947년 9월 1일 해병소령으로 진급과 동시에 부산기지사령관이 되고, 다음해 5월 진해특설기지참모장에 임명되어 해병중령으로 진급, 1949년 2월 1일 초대해병사령관에 임명되어 대한민국 해병대를 창설하였으며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도와 서울 탈환에 앞장서 전공을 세웠으며, 무적해병대의 신화를 창조한 주역으로 국토방위에 헌신하였고 군생활을 마감하고 모로코 대사와 바티칸대사를 역임하였다.
찾아가는 길
승 용 차 : 제 1, 2 경인고속도로, 서해안 고속도로 끝 지점에서 송도유원지 방향 이정표를 따라
송도 유원지까지 온 후 로타리를 돌아 맞은편으로 올라오면 됨
- 인천공항 : 인천대교에서 옥련IC로 나와 송도유원지에서 로타리를 돌아 맞은편으로 올라옴
지하철
인천지하철 1호선 동막역 하차 후 1번 출구에서 나와 6-1번, 8번, 908번 버스이용. 송도유원지 하차 (걸어서 5분)
전철
부평역에서 인천지하철로 환승 후 동막역 하차 1번 출구에서 6-1번, 8번, 908번 시내버스이용, 송도유원지 하차 (걸어서 5분)
주안역에서 65-1번 버스이용 서해아파트앞 하차 (걸어서 5분)
동인천역에서 6번, 16번, 908번 버스이용 송도유원지 하차 (걸어서 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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