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탐방/세계문화유산] 구리 동구릉 (九里 東九陵) 사적 제193호

2012. 1. 10. 14:00전국 문화재와 박물관/국가지정 문화재

 

[문화재탐방/세계문화유산] 구리 동구릉 (九里 東九陵) 사적  제193호

 

조선을 세운 태조의 무덤으로 쓰여지기 시작한 뒤 조선시대를 통하여 가족무덤을 이루고 있는 왕릉군이다. 동구릉이란 도성의 동쪽에 있는 9개의 무덤이란 의미로, 무덤이 생길 때마다 동오릉·동칠릉이라 불렀는데 철종 6년(1855)에 수릉이 옮겨진 이후 동구릉으로 굳어졌다.

태조가 죽은 뒤 태종은 서울 가까운 곳에 후손들이 묻힐 좋은 땅을 찾다가 하륜(河崙)에 의해 이곳을 무덤지역로 정하였다고 한다. 400여 년에 걸쳐 왕릉이 자리잡았음은 동구릉의 지세가 풍수지리설에 의한 명당 임을 나타내주는 것이라 하겠다.

동구릉에는 1대 태조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무덤인 현릉, 14대 선조과 의인왕후·계비 인목왕후의 무덤인 목릉,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무덤인 휘릉,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무덤인 숭릉, 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무덤인 혜릉,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무덤인 원릉, 추존 문조대왕과 신정왕후의 무덤인 수릉, 24대 헌종과 효현왕후·계비 효정왕후의 무덤인 경릉 등 9개의 무덤이 있다. 태조의 무덤인 건원릉은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을 기본으로 삼아서 만들었으며, 조선왕조 최초의 왕릉으로서 이후 왕릉의 본보기가 되었다.

동구릉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왕릉이 변화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다. 무덤을 만들 때 각 무덤에 따른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재실을 지었다고 하나 현재 각 무덤에 재실은 없고, 9개 무덤을 하나의 경계지역으로 하여 구릉 남쪽에 재실이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중앙 북쪽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동쪽에 3개, 서쪽에 5개의 무덤을 거느리고 있는 모습이다. 조선의 왕릉 중 한 지역내에 왕릉군을 이루고 있는 곳은 서오릉과 서삼릉이 있으나, 동구릉에 가장 많은 무덤이 있다.


 

 

 

 

 

 

혜릉(惠陵)

혜릉(惠陵)은 동구릉 서측 능선 숭릉과 경릉 사이에 조성된 단릉이다. 비교적 낮은 구릉에 조성되었으며, 능역이 전반적으로 좁은 형태이다. 석물의 크기 또한 다른 왕릉 보다 작게 만들어졌다. 단의왕후가 승하 시에는 세자빈의 신분이었으므로, 원의 형식으로 단출하게 지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곡장 안의 봉분은 병풍석 없이 12칸의 난간석만 둘러져 있고, 봉분 주위에는 네 쌍의 석호와 석양이 교대로 배치되어 있다.

문석인은 173cm의 키에, 눈을 치켜뜬 차가운 이미지로 조각되었다. 무석인은 문석인보다 약 10cm 큰 키에, 이목구비가 상당히 이국적인데 특히 치아를 잔뜩 드러내 놓고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망주석 역시 다른 능보다 훨씬 작은 규모로 만들었는데 조각된 세호의 좌우 방향이 다르게 되어 있다. 장명등은 현재 터만 남아 있고 사라진 상태이다

능의역사

1718년(숙종 44) 경종의 비 단의왕후 심씨의 혜릉을 조성하였다. 단의왕후는 1718년(숙종 44) 2월 7일 소생이 없이 창덕궁 장춘헌에서 세자빈의 신분으로 승하하였다. 2월 8일에 소렴하고, 9일에 대렴하였다. 산역은 각 도에서 승군 1,000명을 징발하여 조성하였다. 4월 16일에 발인하여, 19일 현종의 능인 숭릉 왼쪽 산줄기에 안장하였다.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추봉하여, 능의 이름을 혜릉이라고 하였다.

경종과 계비 선의왕후는 서울 성북구 석관동의 의릉에 같이 모셔져 있으나, 일찍 승하한 단의왕후의 능인 혜릉은 이곳에 홀로 조성되었다. 6.25로 인해 홍살문과 정자각이 불타서 주춧돌만 남은 상태였으나 1995년 새로 복원하여 왕릉의 면모를 다시금 갖추게 되었다.

 

 

 

 

 

 

 

경릉(景陵)

경릉(景陵)은 세 개의 봉분이 나란히 있는 조선 왕릉 중 유일한 삼연릉 형태이다. 제일 우측의 능침이 헌종의 것이고, 가운데가 효현왕후 능침이며, 좌측이 계비 효정왕후 능침이다. 이는 우왕좌비의 원칙에 따른 것으로 중국 등과는 다르게 배치되어 있어 조선 왕릉의 특징을 볼 수 있다. 모두 병풍석은 없고 난간석으로 세 능침이 이어져 있으며, 각 능침 앞에 혼유석을 따로 놓았다.

봉분 아래가 초계, 중계, 하계 3단의 구획으로 이루어진 영조 이전의 왕릉과는 달리 문석인, 무석인이 한 단에 세워져 있다. 문무석인의 얼굴은 입체적이라기보다는 가는 선으로 조각하여 평면적이지만 눈꺼풀과 눈동자 등은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능의역사

1630년(인조 8) 건원릉의 서쪽 언덕에 있던 선조의 목릉을 천장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는 목릉에 수기가 차고 불길하다는 원주목사 심명세의 상소를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구릉을 파헤치고 현궁을 열어 보니 수기가 없어 그의 불길론은 해소되었다. 따라서 1843년(헌종 9) 춘추 16세로 승하한 효현왕후 김씨의 능을 이 자리에 조성하였다.

그로부터 6년 후 헌종이 승하하자 효현왕후 김씨의 경릉 서쪽에다 모셨다. 건원릉 서쪽에 위치한 이곳은 헌종의 국상 이후 왕릉 택지를 위하여 13곳이나 되는 길지를 돌아다닌 끝에 찾아낸 ‘십전대길지(十全大吉地)’의 명당이라고 전해진다.

1904년에는 춘추 73세로 승하한 헌종 계비 효정왕후 홍씨를 경릉의 동쪽에 모셨다. 이리하여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세 개의 봉분을 가진 왕릉이 완성되었다.

 

 

 

 

왕이 가운데에 있지 않고 오른쪽에 있는 이유

대개 사람들은 왕이 가운데에 묻혀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당시의 사상으로는 무덤에선 우측(누워있는 시신 기준)이 상석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헌종은 효현왕후의 오른쪽에, 계비인 효정왕후는 정비인 효현왕후의 왼쪽에 묻힌 것이다. 이는 다른 능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유독 덕종(의경세자)과 소혜왕후(인수대비)의 무덤에서는 소혜왕후가 상좌인 우측에 안장되어 있다. 남편인 덕종은 죽을 때 세자 신분이었지만, 부인인 소혜왕후는 대왕대비의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남존 여비보다 왕실의 서열이 우선된 것이다.

살아있을 때는 이와 반대로 좌측(앉아있는 사람 기준)이 상석이 된다. 요새 사극에서는 왕이 우측 왕비가 좌측에 앉아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원릉(元陵)

원릉은 병풍석을 세우지 않고 난간석을 둘러 만든 쌍릉이다. 왕릉과 왕비릉 앞에는 혼유석이 각각 놓여 있고, 좌우에 망주석 1쌍이 세워져 있다. 망주석 기단부에 조각된 꽃무늬가 세련되고 화려하다. 좌우 세호 중 오른쪽 망주석에 새겨진 세호는 위를 향하고 있고, 왼쪽 망주석에 새겨진 세호는 아래로 기어 내려가는 모양을 하고 있다. 그리고 능의 중간에 놓인 사각옥개형 장명등은 화사석(火舍石)과 옥개석 부분을 제외하고 상, 중, 하대석 부분은 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문석인은 전체적으로 비율과 입체감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으나, 사실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또한 무석인은 장군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위풍당당하기보다는 유약한 모습을 하고 있다. 무석인의 얼굴에서도 잔잔히 머금고 있는 미소를 찾을 수가 있다.

능의역사

1776년(정조 즉위) 3월 5일 영조가 승하하였다. 영조는 무려 52년에 이르는 긴 재위 기간 동안 여덟 차례에 걸쳐 산릉원을 조성하거나 천장하는 등 산릉제도에 관심이 컸다. 원비 정성왕후가 잠든 서오릉의 홍릉을 자신의 자리로 정해 쌍릉으로 조영하기를 바랐으나, 손자인 정조는 영조가 승하한 그 해 7월 27일 건원릉 서쪽 두 번째 산줄기에 그를 안장하고 원릉이라고 했다.

원래 이곳은 1660년(현종 1) 10월 효종 능인 영릉이 조영되었던 곳인데, 1673년(현종 14) 석물에 틈이나 빗물이 스며들 염려가 있다고 하여 천봉하기로 하고 봉분을 열었으나 깨끗하여, 끝내는 당론으로 번져 전날의 영릉도감의 책임자까지 파직되었던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다. 원릉을 조성한지 29년이 지난 1805년(순조 5)에는 61세의 나이로 승하한 영조 계비 정순왕후 김씨를 원릉의 옆에 모셨다.

 

 

 

 

 

 

 

 

 

 

건원릉(健元陵)

건원릉은 조선 1대 태조의 능으로, 조선 왕릉 제도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 능제는 전체적으로 고려 공민왕의 현릉을 따르고 있으나, 고려 시대에는 없던 곡장을 봉분 주위에 두르는 등 세부적으로 석물의 조형과 배치 면에서 일정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석물의 조형은 남송 말기의 중국풍을 거의 따르고 있다.

봉분에는 다른 왕릉들처럼 잔디를 심지 않고 억새풀을 덮었는데, 고향을 그리워하는 태조를 위해 태종이 고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덮어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높고 웅장한 봉분의 아래 부분은 다양한 문양을 새긴 12면의 화강암 병풍석이 둘러싸고 있다. 병풍석에는 열 두 방향의 악재로부터 왕릉을 보호하기 위해 십이지신상을 새겼다. 병풍석 밖으로는 12칸의 난간석을 둘렀고, 난간석 밖으로는 석호와 석양이 네 마리씩 교대로 배치되어 있다. 석호와 석양은 왕을 지키는 영물들로, 밖을 향하여 언제든지 방비할 수 있는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이 있는데, 혼유석 밑에는 도깨비가 새겨진 북 모양의 고석 5개가 놓여 있다. 한 단계 아래쪽에는 장명등과 석마 한 필씩이 딸려 있는 문석인이 놓여 있고, 그보다 더 아래쪽으로는 무석인과 석마가 양쪽에 놓여 있다.

능의역사

1408년(태종 8) 태종은 1대 태조의 건원릉을 조성하였다. 태조는 1408년 5월 24일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74세로 승하하였다. 그해 6월 12일 검교 판한성부사 유한우, 전 서운정 이양달, 영의정 하윤 등이 원평, 봉성, 행주 등의 길지를 후보지로 내세웠으나 채택되지 못하였고, 6월 28일 지금의 구리시인 양주의 검암에 산릉지를 정하였다.

7월 5일에 충청도에서 3,500명, 황해도에서 2,000명, 강원도에서 500명 등 총 6,000명의 군정을 징발하여 7월 말을 기하여 산릉의 역사를 시작하게 하고 석실을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는 9월 7일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빈전에 나아가 견전례를 행하고 영구를 받들어 발인하였다.

태조는 생전에 계비 신덕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원해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貞陵)에 자신의 묏자리를 마련해두었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은 태종은 부왕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신덕왕후의 능을 도성 밖으로 이장하고, 태조의 능을 지금의 자리에 조성하였다.

 

 

 

 

  

 

 

 

목릉(穆陵)

동구릉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목릉에는 14대 선조와 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 세 사람이 잠들어 있다. 같은 능역 안의 각각 다른 언덕에 왕릉과 왕비릉을 조성한 동원이강릉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제일 왼쪽에 보이는 것이 선조의 능이고, 가운데가 의인왕후, 오른쪽이 인목왕후의 능이다.

선조의 능에는 3면의 곡장이 둘러져 있고, 병풍석에는 십이지신상과 구름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여기에 난간석과 혼유석, 망주석 1쌍과 석양, 석호 2쌍이 배치되어 전형적인 상설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

의인왕후릉은 병풍석이 생략된 채 난간석만 둘러져 있다. 임진왜란을 치른 후 능을 조성했기 때문에 석물들의 크기만 클 뿐 사실적이지도 입체적이지도 못하다. 그러나 망주석과 장명등 대석에 새겨진 꽃무늬는 처음 선보인 양식으로 인조 장릉의 병풍석에까지 새겨지는 등 조선 왕릉 조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인목왕후릉 역시 의인왕후릉과 같은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좀 더 생동감이 있어 보인다.

능의역사

목릉의 능역은 원래 1600년(선조 33) 의인왕후 박씨가 승하하자 왕비릉인 유릉(裕陵)의 터로 정해진 곳이다. 1608년(광해군 즉위) 선조 승하 후 선조의 능인 목릉은 원래 건원릉의 서편에 조영되었는데, 물기가 차고 터가 좋지 않다는 심명세(沈命世)의 상소에 따라 1630년(인조 8) 현 위치로 천장되고 유릉과 목릉의 능호를 합칭하여 목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1632년(인조 10)에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가 세상을 떠나자 계비의 능을 왕릉의 동편 언덕에 조영하게 되어 오늘날의 세 능을 이루게 되었다. 따라서 정자각도 세 능이 들어설 때마다 자리를 바꾸게 되었다. 원래는 동편의 의인왕후릉 앞에 있었던 것이 후에 왕릉이 천장되면서 왕릉 앞에 정자각이 서고 왕비릉의 정자각은 헐리게 되었다. 여기에 계비 인목왕후의 능이 들어서자 한때 왕릉 쪽으로 치우친 정자각을 다시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이전이 번거롭다 하여 왕비릉은 신로만 정자각에 접하도록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따라서 현재 목릉의 정자각은 왕릉을 향하여 서 있으면서 신로는 세 능으로 모두 뻗어 있다.

 

 

 

 

 

 

 

 

 

  

 

 

 

 

 

 

 

 

 

 

 

 

 

 

 

 

 

 

 

 

 

현릉(顯陵)

현릉에는 5대 문종과 그의 비 현덕왕후가 잠들어 있다. 이렇게 왕과 왕비를 한 능에 묻는 경우에는 다양한 양식이 존재한다. 현릉의 예처럼, 같은 능의 이름 아래 있지만, 왕과 왕비의 능을 각각 다른 언덕 위에 따로 만든 능을 동원이강릉이라고 한다. 정자각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 위의 언덕에 있는 능이 문종의 능이고, 오른쪽 언덕의 능이 현덕왕후의 능이다. 홍살문을 비롯하여 정자각, 비각 등을 하나씩만 만들어놓아 이 능이 동원이강임을 나타내고 있다.

현릉의 능제는 『국조오례의』의 본이 된 세종대왕의 예전 능의 제도를 따랐다. 병풍석에서는 이전 왕릉에 있던 방울과 방패 무늬가 사라졌고 구름무늬가 도드라진다. 고석도 4개로 줄었다. 제일 아랫단에는 장검을 두 손으로 짚고 서 있는 무석인이 있는데 머리와 눈, 코가 매우 크게 표현되었다. 문석인도 튀어나온 눈과 양쪽으로 깊이 새겨진 콧수염이 이국적이다. 신도비는 임금의 치적이 국사에 실리기 때문에 굳이 사대부처럼 신도비를 세울 필요가 없다는 의논에 의해서 이때부터 건립하지 않았다.

능의역사

5대 문종은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인 1452년(단종 즉위) 5월에 경복궁 정전에서 승하하였다. 건원릉의 남동쪽에 현릉을 조성하였다. 능지를 정할 때에는 수양대군, 왕보인, 김종서, 정인지 등의 대신을 비롯하여 풍수학랑관이 현지를 답사하고 정하였다. 그의 비인 현덕왕후 권씨는 문종이 승하하기 11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1441년(세종 23) 단종을 낳고 병이 위독해져 24세의 나이로 문종보다 먼저 승하하였는데, 안산의 소릉에 장사지냈다.

이후 단종의 복위 사건에 의해 1457년(세조 3) 추폐되었다가 1512년(중종 7) 복위되어 그 다음해 봄, 문종이 묻혀 있는 현릉의 왼쪽 산줄기 언덕에 천장하였다. 사후 72년 만에 왕의 곁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렇게 하여 동원이강릉을 조성한 후에는 정자각을 두 능의 중간 지점으로 이건하였다. 이 때 양릉 사이에 소나무가 빽빽하게 있었는데, 능역을 시작하자 저절로 말라 죽어 두 능 사이를 가리지 않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수릉(綏陵)

수릉(綏陵)은 하나의 봉분에 혼유석 역시 하나만 마련되어 있어 마치 한 사람만을 위한 단릉처럼 보이지만, 문조와 신정익황후 조씨의 합장릉이다. 수릉 이전의 왕릉은 일반적으로 봉분 앞이 초, 중, 하계 3단의 높이로 나뉘어, 중계에는 문석인이, 보다 낮은 하계에는 무석인이 배치되었다. 그러나 수릉에서는 중계와 하계가 합쳐져 문석인과 무석인이 같은 공간에 배치된다. 이는 신분제도의 변화에 의한 것이며, 이러한 상설제도는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에 따라 영조 때부터 따르게 되었다.

문석인은 금관조복에 얼굴이 길쭉하고 눈과 입술이 선적으로 가늘게 표현되었다. 어깨를 움츠리고 목을 앞으로 빼고 있는 형태에서 조선시대 후기 인물조각의 전형성을 볼 수 있다.

능의역사

효명세자가 1830년(순조 30) 승하하자 성북구 석관동 의릉 왼쪽 언덕에 세자의 무덤형식인 원(園)으로 능을 조영하고, 연경묘라고 하였다. 그 후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이 1835년 즉위하자 그를 익종으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수릉이라고 하였다. 1846년(헌종 13)에는 풍수상 불길하다는 의논이 제기되어 천장하기로 하고, 현궁을 발굴하여 정자각에 봉안하였다. 그리고는 그 해 5월 19일에 발인하여, 20일에 양주 용마산 아래로 천장하였다.

1855년(철종 6) 8월에 다시 능을 발굴하여 건원릉 좌측 언덕으로 천장하였다. 1890년(고종 27)에는 춘추 83세로 승하한 신정왕후를 수릉에 합장하여 모셨다. 1899년(광무 3)에는 익종은 문조익황제로, 신정왕후는 신정익황후로 다시 추존되었다.

 

 

 

 

 

 

 

 

숭릉 崇陵

왕과 왕비를 하나의 곡장 안에 모셔 봉분이 나란히 2기로 조성된 능을 쌍릉이라고 한다. 높지 않은 언덕 위에 쌍릉으로 조영된 숭릉은 왕릉과 왕비릉 모두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으로 연결되었고, 능침 앞에 혼유석이 하나씩 놓여 있다. 곡장 안의 석양과 석호 각 2쌍과 망주석 1쌍이 초계를 이루었고, 중계에는 장명등, 문석인 1쌍과 석마 1쌍이 배치되었으며, 하계에는 무석인 1쌍과 석마 1쌍이 배치되었다.

봉분 앞의 장명등과 망주석에는 인조의 장릉처럼 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망주석 위쪽에 ‘세호’라고 불리우는 작은 동물 조각이 뚜렷하게 조각되어 눈길을 끈다. 문석인은 미소를 머금고 온화한 모습이고 무석인은 입을 굳게 다물고 눈을 부릅뜨고 있는 절도 있는 모습이다.

능의역사

현종은 1674년(숙종 즉위) 8월 18일 34세로 창덕궁 대조전 양심각에서 승하하였다. 그 해 8도의 승군 2,650명을 징발하여 숭릉을 조영하였다. 12월 11일에 발인하여, 13일 건원릉 남서쪽 별도의 산줄기에 봉릉하였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684년(숙종 10)에는 현종의 비 명성왕후 청풍 김씨의 능을 조영하였다. 명성왕후는 1683년(숙종 9) 12월 5일 창경궁 저승전 서별당에서 42세에 승하하였다.

12월 7일에 소렴하고, 12월 9일에 대렴하였으며, 1684년 4월 3일에 발인하여 4월 5일에 봉릉하였다. 숭릉의 혈을 파기 위해 겉흙을 걷어냈을 때 부도를 세우려 했던 흔적이 나왔으나, 깊이가 3척밖에 되지 않아 지맥을 손상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한 광중 밖이기 때문에 그대로 진행했다.

 

 

 

 

 

관람제한구역(숭릉)

 

 

 

찾아가는 길

주소~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

교통편

버스- 청량리에서 88, 202→상봉역(88, 202)→구리시→동구릉   강변역에서 1,1-1,9-2→구리시→동구릉

-전철(중앙선) 구리역에서 마을버스 2,6 → 동구릉

승용차- 서울 → 동서울 → 구리시 → 동구릉

-서울 → 의정부 → 퇴계원 → 동구릉

서울 → 화랑대사거리 → 구리시 → 동구릉

서울 → 망우리 → 교문사거리 → 동구릉

※ 구리시내에서 퇴계원 방향(43번국도)으로 약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