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탐방] 여주 고달사지 (驪州 高達寺址) 사적 제382호

2012. 1. 12. 22:24전국 문화재와 박물관/국가지정 문화재

 

여주 고달사지 (驪州 高達寺址) 사적  제382호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처음 세워진 후, 고려 광종 이후 역대 왕들의 보호를 받아 큰 절로 성장하였다. 고달사에는 석조 문화재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모두 고달이라는 석공이 만들었다고 전한다. 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절을 이루는 데에 혼을 바쳤다고 하는데, 절을 다 이루고 나서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며, 훗날 도를 이루어 큰스님이 되니, 고달사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
절터 안에는 깔끔한 모양과 세련된 조각수법의 고달사지부도(국보 제4호)를 비롯하여 훌륭한 문화재들이 많이 남아 있다. 고달사 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와 이수(보물 제6호)는 원종대사의 행적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탑비로 975년에 만들었는데,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시대 초기로 넘어가는 탑비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달사 원종대사혜진탑(보물 제7호)은 원종대사의 묘탑으로 아름답고 화려한 조각이 있어 고려시대 부도의 조각 수법이 잘 나타나 있다. 그 밖에 고달사지석불좌(보물 제8호)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긴 고달사지쌍사자석등(보물 제282호)이 있다.
최근에 발굴조사를 통해 금당터를 비롯한 건물터를 확인하고, 절터의 규모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글출처~문화재청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 (驪州 高達寺址 石造臺座) 보물  제8호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되었으나, 누구에 의해 창건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이 석불대좌는 불상(佛像)은 없어진 채 대좌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보존상태가 거의 완벽하다.
받침돌은 위·중간·아래의 3단으로, 각기 다른 돌을 다듬어 구성하였는데, 윗면은 불상이 놓여져 있던 곳으로 잘 다듬어져 있다.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잎을 서로 대칭되게 돌려 새겼다. 이 대좌가 사각형으로 거대한 규모이면서도 유연한 느낌을 주는 것은 율동적이면서 팽창감이 느껴지는 연꽃잎의 묘사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연꽃잎의 표현 수법은 여주 고달사지 승탑(국보 제4호) 아래받침돌과 매우 비슷하며, 가운데 꽃잎을 중심으로 좌우로 퍼져나가는 모양으로 배열하는 방법은 고려시대의 양식상 공통된 특징이다.
조각솜씨가 훌륭한 사각형 대좌의 걸작으로, 절터에 있는 여주 고달사지 승탑이 고려 전기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대좌도 10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驪州 高達寺址 元宗大師塔碑) 보물  제6호

 

고달사터에 세워져 있는 비로, 원종대사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869)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958)에 90세로 입적하였다. 광종은 신하를 보내어 그의 시호를 ‘원종’이라 하고, 탑이름을 ‘혜진’이라 내리었다.
현재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이 남아 있으며, 비몸은 깨어진 채로 경복궁으로 옮겨져 진열되어 있다. 비문에는 원종대사의 가문·출생·행적 그리고 고승으로서의 학덕 및 교화·입적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한다.
받침돌의 거북머리는 눈을 부릅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눈꼬리가 길게 치켜올라가 매우 험상궂은 모습이다. 다리는 마치 땅을 밀치고 나가려는 듯 격동적이고, 발톱의 사실적 표현은 땅을 꼭 누르고 있는 듯하다. 목은 길지 않아 머리가 등에 바짝 붙어 있는 듯 하다. 등에는 2중의 6각형 벌집 모양이 정연하게 조각되었으며, 중앙부로 가면서 한 단 높게 소용돌이치는 구름을 첨가하여, 비를 끼워두는 비좌(碑座)를 돌출시켜 놓았다.
머릿돌은 모습이 직사각형에 가깝고, 입체감을 강조한 구름과 용무늬에서는 생동감이 넘친다. 밑면에는 연꽃을 두르고 1단의 층급을 두었다.
이 거북받침돌과 머릿돌은 탑비에 기록된 비문에 의해 975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거북의 머리가 험상궂은 용의 머리에 가깝고, 목이 짧고 앞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점, 비머리의 표현이 격동적이며, 특히 소용돌이치는 구름무늬의 번잡한 장식 등은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진전되는 탑비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 (驪州 高達寺址 元宗大師塔) 보물  제7호

 

넓은 절터 안에 많은 석조 유물들이 흩어져 있는 가운데 탑비와 함께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고 있다. 이 탑은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에 탑신(塔身)과 지붕돌을 올린 형태로,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기단부에서 특이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기단부는 네모난 바닥돌에 연꽃잎
을 돌려 새겼다. 아래받침돌은 네모난 형태이며, 가운데받침돌 윗부분부터 8각의 평면이 보인다. 즉 윗부분에 1줄로 8각의 띠를 두르고, 밑은 아래·위로 피어오르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그 사이에는 거북이가 몸을 앞으로 두고, 머리는 오른쪽을 향했으며 이를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4마리의 용이 구름 속에서 날고 있다. 윗받침돌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다.
탑신은 4면에는 문(門)모양이, 다른 4면에는 사천왕입상(四天王立像)이 새겨져 있다. 지붕은 처마가 수평이나 귀퉁이 부분에서 위로 향하였고 꽃장식이 달려 있다. 꼭대기에는 지붕돌을 축소해 놓은 듯 한 머리장식이 올려져 있다.
이 탑은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면서 아래받침돌을 네모반듯하게 짰음은 시대적인 특색이라 하겠다. 가운데받침돌의 조각은 가장 두드러지게 고려시대의 수법을 나타내었고, 각 부의 조화도 우아하고 화려하다. 기단부가 약간 비대한 듯 하지만 좋은 비례를 보여준다.
이 탑의 주인공인 원종대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9년(869)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958)에 입적한 고승이다. 건립연대는 원종대사탑비의 비문에 의하여 고려 경종 2년(977)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달사지부도 국보 4호

 

고달사지부도는 1962년 12월 20 일에 국보 4호로 지정됐으며, 기단 부‧상륜부‧탑신부를 모두 갖춘 전형 적인 팔각원당형 석조부도로 높이는 3.4m이다. 건립연대나 주인공은 밝 혀지지 않았지만, 고려 초기 석조부 도의 양식을 대표할 수 있는 걸작으 로 평가받고 있다. 부도(浮屠)는 승탑 이라고도 불리며 고승(高僧)의 사리 를 안치한 탑을 일컫는다.
이 부도는 상륜부를 제외하면 전 체적으로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데, 기단의 외곽에는 여러 장의 장대 석(長臺石, 포장석으로서 긴 쪽 방향 으로 깐 장방형의 마름돌)으로 구성 한 팔각형의 탑구(塔區)를 형성했다. 기단은 수매의 판석(板石)으로 짜인 팔각형의 지대석(址臺石) 상면에 2단 의 받침을 조출(造出)한 후 하대석‧중대석‧상대석을 차례로 놓았다.
탑신석의 각 면 모퉁이에는 우주 를 모각(模刻)하고 문비형(門扉形)과 사천왕상, 영창(映窓) 등을 조각했다. 문비형은 비교적 굵게 묘사된 선으로 장방형의 외곽을 구성한 후 내부에 자물통을 양각했는데, 전체적으로 탑 신에 비해 작게 조성돼 부조화를 이 루고 있다.
옥개석(屋蓋石, 석탑이나 석등 따 위의 위에 지붕처럼 덮는 돌) 역시 평 면 8각으로 비교적 두껍게 조성했다. 아랫면에는 깊숙이 낮고 널찍한 받침 을 조출해 탑신석 상단부와 맞게 했 고, 각 면에는 비천상(飛天像)을 조각 했다. 비천상은 상호(相好)와 신체가 풍만하게 조성돼 그리 날렵한 인상을 주지는 못하지만, 유려하게 날리는 천의 자락에서 역동적인 자태를 느낄 수 있다.
또한 이 부도는 신라시대에 정착된 팔각원당형 부도의 양식을 충실히 계 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정제된 조형미와 세련된 조각수법에 서 장중한 작풍(作風)을 보이고 있다. 나아가 9세기 말 강원도 양양 선림원 지에서 시도된 중대석의 양식을 계승 하고 있어 주목된다. 부도에 딸린 탑 비(塔碑)가 없어 주인공을 알 수 없지 만, 각 부의 조각 수법과 양식 등으로 보아 같은 사역에 있는 원종대사(元宗大師, 968년 입적, 광종 9년)의 묘 탑(墓塔)인 혜진탑(慧眞塔)보다 앞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부도는 사역에서 떨어진 서쪽 산 중턱에 있는 까닭에 1950년대까 지는 지대석은 물론 석축이 모두 파 묻혀 있었다고 한다. 이 상황에서 도 마을에서는 매년 8월이면 금줄 을 매고 제의(祭儀)를 지냈다고 한다. 1950년대에 도굴범들에 의해 옥개석 이 일부가 파손돼 이를 바로 잡고, 토 사의 유출로 말미암아 매몰됐던 지대 석을 노출하고, 석축을 정비하던 중 건립 당시의 배면(背面) 석축과 더불 어 배례석 및 8각형의 석재가 확인된 바 있다.
1979년에 이르러 옥개석에 대한 접착공사를 진행한 후 보존되다가 2002년 봄에 다시 도굴범에 의해 옥 개석이 들려지고, 귀꽃의 일부와 상 륜부재가 파손되어 같은 해 8월에 정 비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여주 고달사지 (驪州 高達寺址) 사적  제382호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4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