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생가~경기유형문화재 제46호

2012. 1. 9. 20:00전국 문화재와 박물관/국가지정 문화재

명성황후 생가~경기유형문화재 제46호

 

명성황후 생가는 1973년 7월 10일 경기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었다. 고종황제(1863~1907)의 비 명성황후 민씨(1851~1895)가 태어나서 8세까지 살던 집으로 1687년(숙종 13)에 부원군 민유중(閔維重)의 묘막(墓幕)으로 건립되었다. 당시 건물로서 남아 있는 것은 안채 뿐인데 1975년과 1976년에 한번 중수하였다가 1996년에 다시 수리하면서 행랑와 사랑, 별당 등을 함께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넓은 바깥마당에서 솟을대문을 지나 ㅡ자형 행랑채가 있고, 중문과 사랑이 붙은 ㄱ자형 문간채와 안채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ㅁ자형을 이루며, 그 옆으로 독립된 ㅡ자형 별당이 있다.
안채는 14칸짜리 민도리집이고 8칸짜리 팔작지붕인 본채 한쪽에 6칸짜리 맞배지붕 날개채가 붙어 ㄱ자형을 이룬다. 본채는 전면에 툇간이 있는 5량구조로 안방(2칸)과 대청(4칸), 건넌방(1칸 반), 부엌(2칸)이 일자로 배치되어 있고 날개채는 3량구조로 안방 앞쪽에서 꺽어져 방(1칸 반), 부엌(3칸), 광(1칸 반)으로 이루어졌다.
그리 크지 않은 재목을 사용한 아담한 규모이지만 부재의 형태와 결구법 등에서 조선중기 살림집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명성황후는 1851년(철종2) 음력 9월25일 여주군 근동면 섬락리 (지금의 여주읍 능현리 250-2)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민치록(閔致祿) 1799~1858 추증 영의정, 여성부원군, 시호는 순간(純簡), 여양부원군 민유중(閔維重)의 5대 손으로 자는 원덕(元德)이다. 벼슬은 1830년(순조30) 참봉을 시작으로 과감현천 (종6품), 임피현령(종5품),덕천군수(종4품),장악원 첨정(僉正 종4품)을 거쳐영천 군수(종4품)에 이르렀다. 민치록의 첫 번째 부인은 해령부부인으로 추증된 해주 오씨(1788 ~1833)로 조선말기의 유명한 노학자 노주(老州) 오희상(吳熙常)의 딸 이었는데 자녀를 낳지 못하고 죽었으며, 두 번째 부인 (한산 이씨 1818~ 1874 한창부부인)이 명성황후의 생모로서 훗날 민승호와 함께 죽동궁에서 폭사 당한 바로 그 이다.

 

 

 

 

여주읍 능현리에는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묘가 있다. 종손인 민치록은 이 묘를 지키며 묘막에서 살다가 명성황후를 낳았다. 명성황후의 생가이기도 한 이 묘막은 1687년(숙종13)에 지었는데 그동안 쇠락하여 27평만 남았던 것을 1995년 여주군에서 58평규모로 복원하였다. 명성황후의 공부방이 있던 자리에 서있는 碑에는 앞면에는 「명성황후탄강구리 明成皇后誕降舊里,명성황후가 태어나신 옛마을)」이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광무팔년갑진오월배수음체경서(光武八年甲辰五月拜手飮涕敬書, 광무8년 갑진 오월 어느날 손을 들어 맞잡고 절하며 눈물을 머금고 경건히 쓰다)」라고 새겨져 있다. 고종의 친필이라고 전하나 뒷면에 쓰인 글의 내용과 글씨체로 미루어 명성황후의 아들 순종이 썼다고 보아야 한다.

 

 

 

 

민치록 일가가 언제까지 여주에서 살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안국동에 있었던 감고당에서 1858년(철종9) 9월 17일 민치록이 사망하였으므로 명성황후가 7~8세까지 능현리에서 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감고당(感古堂 서울시 안국동 36번지, 지금의 덕성여고 자리)은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친정을 위하여 지어준 집으로 희빈 장씨의 모함을 받아 폐위된 후 5년(1689~1694)동안 유폐되어 이던 곳이다. 그후 여흥민씨 종중에서 관리하면서 여양부원군의 제사를 받들어 왔는데 민치록은 말년에 여주로 옮겨와 이 집에서 살았다.
 운현궁과 감고당은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딸 하나만 둔 민치록의 대(代)는 민치구(閔致久)의 둘째 아들 승호가 양자로 들어와 계승했다. 민승호(閔升鎬 1830~1874)는 흥선대원군의 처남으로 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 민씨의 친동생이다. 촌수로는 12촌 이었지만 민승호가 양자로 입적된 후 명성황후는 자주 운현궁을 왕래하면서 부대부인 민씨의 귀여움을 받게 되는데 영리하고 재기 발랄 함으로 인해 인근의 칭찬이 높았다. 이때 한 살 아래인 고종이 명성황후를「안동방 아줌마」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명성황후의 인품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자료가 하나 더 있다. 명성황후가 죽은 뒤에 쓰여진 것이라 미화된 부분이 있을 수 있으나 없는 것을 지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1897년(光武원년 고종34) 10월 명성황후의 시신을 경운궁의 경효전(景孝殿)에서 홍릉으로 옮기면서 궁내부 특진관 김병시(金丙始)가 고종의 명을 받아 제술한 명성태황후 애책(哀冊)에 보면 [저 울창하고 누런 명마의 땅 여주에서 일찍이 사록(沙麓)의 상서가 저축되더니 우리 인현왕후로 부터 6세에 이르러 거듭 빛을 발하여 왕도가 거기에 터를 잡은 바되고 중궁의 교화가 도탑게 펼쳐졌습니다. 부드러워 온화하고 공손하시며 은혜로운 학문은 가득차고도 심오하시었으며, 종모 사직을 받드는 제수에 정성과 경건을 다하시고 가르침에는 동륙을 먼저 하시고 아랫사람을 거느림에는 몸소하심을 우선 하시니 열어(列御) 모두 흠복하였습니다. 역대의 사승(史乘)과 국조의 헌장(憲章)을 한번 편람하시면 문득 기억하고 암송하시었으며, 영특한 인재를 가려내고 조잡한 자를 쓸어내시면서 한결같이 사교(四敎:婦德,婦言,婦容,婦功)를 준수하여 움직임과 금슬이 종고(鐘鼓)와 같으시니 나라의 풍교가 거기에서 비롯되었고 반려(伴侶)에게서 어진 바를 구하시니 경계하는 바로서 올바름을 도모하여 도우신 것이 깊고도 커서 밝고 큰 천명을 맞이하여 이으시게 하였습니다. 현익(임오군란이 났던 1882년을 이름)의 해를 만나 어둡고 가난한 운수를 당하셔서는 험조한 경로를 거듭 겪으셨으나 지극하신 덕이 투체되지 아니하였습니다]라고 쓰여 있다.
국모 명성황후의 앞날이 순탄치만은 않으리라는 예고이기나 한것처럼 1866(고종3)은 벽두부터 술렁이고 있었다. 북경조약으로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톡까지 진출한 러시아가 수차례 통상을 요구하자 이미 청나라가 구미열강에게 곤욕을 치루고 있음을 알고 있던 조정에서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수단으로 프랑스 세력을 통해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방아책이 대두되었다. 당시 조선에는 프랑스인 주교 베르뇌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대왕대비 조씨와 유림으로부터 천주교를 비호한다는 비난을 들으면서까지 천주교에 호감을 보였던 대원군도 조선천주교인을 통해 프랑스세력을 끌어들일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종삼(南鐘三)을 통해 베르뇌 주교와의 접촉이 실패하자 대원군은 태도를 돌변하여 1866년 1월 9일 베르뇌 주교화 홍봉주, 남종삼 등을 체포하고 1월 21일 효수형에 처했다. 이것이 1801(辛酉迫害), 1839년(乙亥迫害)에 이어 전국을 핏빛으로 물들이면서 8천여명의 순교자를 낸 병인박해(丙寅迫害)의 시작이었다.
경복궁 중건이 한창이던 1866년 3월 6일밤(왕비간택이 발표되기 하루전) 광화문 동쪽에 있는 동십자각(東十字閣) 근처 훈국화사(訓局畵師)의 가가(暇家)에서 불이나 인접한 가옥 8백여간이 타고 공사에 쓰일 목재가 모두 소실되었다. 대원군은 입직 당상관 임태영(任泰瑛)을 파면시키고 수직군사들을 유배형에 처하면서 한편으로는 공사를 강행시켰다. 그러나 가까운 곳의 목재는 거의 베어다 썼으므로 목재와 석재의 운반거리가 점차 멀어지게 되어 그만큼 인력과 재정이 과다하게 소모되었다. 더구나 마을의 성황당 거목과 양반묘지의 보호림까지 벌채해 차츰 민심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궁궐에 들어온 명성황후는 신정왕후(神貞王后, 익종비) 조씨, 효정왕후(孝定王后, 헌종비) 홍씨, 철인왕후(哲仁王后, 철종비) 김씨 등 3명의 대비와 왕실의 어른은 물론 대원군과 부대부인에게도 효성을 다하고 수많은 궁녀들을 대함에 있어서도 기품을 잃지 않아 궁중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한몸에 모았다. 친정쪽 집안의 제삿날이나 생신일을 기록하였다가 일일이 제수와 반찬 등을 챙겨보내는 자상함도 잃지 않았다. 명성황후보다 3년 먼저 궁중생활을 시작한 고종은 이때 궁인 이씨를 총애하고 있었다. 자연 고종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명성황후는 주위의 연민속에 독서를 심취하게 되는데 사서삼경, 춘추좌씨전 등의 고전과 대원군이 비상한 열의를 가지고 편찬케 한 대전회통(大典會通), 종실의 종보인 선원보략(璿源譜略), 주요 양반가분의 족보를 간추린 동국세보(東國世譜) 등 고금의 명서들을 탐독 통달하여 후일 고종을 도와 국정에 참여할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명성황후탄강구리비 (明成皇后誕降舊里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1호

 

명성황후 민씨의 생가에 남아 있는 비로, 비가 서있는 이 자리는 어렸을적 그녀의 공부방이 있더 터라고 한다.
명성황후는 조선 철종 2년(1851)에 태어나, 고종 3년(1866)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후 조선말의 어지러운 격동기를 보내다, 고종 32년(1895) 일본 자객에 의해 시해되면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다. 광무 1년(1897)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선포할 때, 명성황후로 추봉되었다.
비는 반듯한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비의 앞면에는 ‘명성황후탄강구리(明成皇后誕降舊里,명성황후가 태어난 옛마을)’라는 비의 명칭을 새겼고, 뒷면에는 ‘광무팔년갑진오월일배음경서(光武八年甲辰五月日拜飮敬書,광무 8년 갑진오월 어느날 엎드려 눈물을 머금고 공경히 쓰다)’라 새겨놓았다. 글씨를 쓴 이는 알 수 없으나 황태자 시절의 순종이 썼을 것으로 추측된다.
1904년에 세운 것으로, 세울 당시에는 생가가 제법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하나, 현재는 일부만 남아있다. 비를 보호하고 있는 비각은 많이 퇴색되고 낡아서, 1970년도에 새로이 보수하였다.

 

 

 

 

 

 

 

 

 

 

 

 

 

감고당 [感古堂]

감고당은 조선시대 제19대 숙종이 인현왕후()의 친정을 위하여 지어준 집이다. 인현왕후의 부친인 민유중()이 살았으며, 인현왕후가 폐위된 후 이곳에서 거처하였다. 이후 대대로 민씨가 살았으며, 1866년(고종 3) 이곳에서 명성황후가 왕비로 책봉된다. 왕비로 책봉된 명성황후는 과거 인현왕후의 일을 회상하여 '감고당()' 이란 이름을 붙였다. 본래는 서울 안국동 덕성여고 본관 서쪽에 있던 것을 도봉구 쌍문동덕성여자대학교학원장 공관으로 옮겼으며, 이후 여주군의 명성황후 유적 성역화 사업에 따라 경기도 여주군 명성황후의 생가 옆으로 이전·복원되었다.

 

 

 

 

 

 

 

 

명성황후순국숭모비

 

 

 

 

명성황후기념관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고자 건립하였으며 명성황후(明聖皇后, 1851~1895) 생가 맞은 편에 있다. 전시실은 면적 520㎡로 명성황후와 고종의 어진 등의 유물·같은 시기에 활약하였던 여흥민씨들의 유물과 관련 자료들을 전시한다.
기념관 주변에는 주차장과 공중화장실·연못 등 편의시설이 있고, 앞마당에는 명성황후의 자주정신과 개화사상을 추모하기 위한 조각공원이 있다.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설날과 추석 당일을 제외하고 연중 내내 개관한다.

 

 

 

 

 

 

명성황후의 구국이념인 이이제이 사상

[외세의 침략은 외세의 힘을 이용해서 막는다] 명성황후의 구국이념인 이이제이 사상 - 서구 열강과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침략하던 시기에 나라의 근본인 백성이 굳건해야 나라가 편안할 수 있다고 믿었던 명성황후는 뛰어난 인재를 고루 등용했으며, 외교적으로는 외국의 침략 세력끼리 서로 견제하고 싸우게 하는 ‘이이제이’론을 펼쳐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하였다.

 

교지

 

 

명성황후국장

일본은 1895년 10월 8일에 일본 낭인들을 궁중에 침입시켜서 명성황후를 난자시해하고 시신은 궁궐밖으로 운반 소각해 버렸다. 그 뒤 일제의 강압으로 폐위되어 서인(庶人)까지 되었다가 광무 일년에 복호(復號)되었으며 1897년에 명성(明成)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그 해 11월 국장으로 청량리 홍릉으로 옮겨져 조성되었다가 후에 고종과 함께 현 위치인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이장하여 자리 잡았다.

 

 

 

지휘도~명성황후 당숙이신 민치일이 1887년 호서수군방어사 당시 사용하였던 지휘용 칼 (1880년)

 

 

 

 

 

 

시해도

1895년 양력 10월 8일 새벽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두 번째 칼을 휘둘러 명성황후를 절명케 한 칼로서 길이는 1m 20cm 로 성인이 한 손으로 휘두르기에 힘겨울 정도로 무겁고 아직도 날이 시퍼런 살상용 칼이다. 칼집에는 [一瞬電光剌老狐](단숨에 전광과 같이 늙은 여우를 베었다) 라는 섬뜩한 글이 적혀 있으며 작전명을 [여우사냥]이라고 붙였음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명성황후 생가~경기유형문화재 제46호

주소~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250-2
문의전화~031-880-4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