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늠름한 모습 그대로 우리곁에 돌아올 대한민국 국보1호

2012. 1. 15. 17:15전국 문화재와 박물관/국가지정 문화재

서울 숭례문 (서울 崇禮門) 국보 제1호

 

조선시대 서울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숭례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이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 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봉유설』의 기록에는 ‘숭례문’이라고 쓴 현판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서울 성곽 중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ㅇ 숭례문 방화 화재(2008.2.10)

- 2008년 숭례문 방화 사건(崇禮門放火事件)은 2008년 2월 10일 ~ 2월 11일 숭례문 건물이 방화로 타 무너진 사건이다. 화재는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전후에 발생하여 다음날인 2008년 2월 11일 오전 0시 40분경 숭례문의 누각 2층 지붕이 붕괴하였고 이어 1층에도 불이 붙어 화재 5시간 만인 오전 1시 55분쯤 석축을 제외한 건물이 붕괴됨. 현재 복구공사로 2012년 12월 공사완료 예정임. 복구후에도 국보1호는 그대로 유지됨. 글출처~ 문화재청

 

 

 

 

 

숭례문의 이해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는 한양을 도읍지로 정한 후 먼저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도읍을 방어하기 위하여 서울 주위로 성곽을 쌓도록 하고 동서남북에 4대문을 두고, 그 사이사이에 4소문을 두어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남쪽에 있는 큰 문을 숭례문(崇禮門)이라 하였으며, 남쪽 문은 한 나라의 도성을 출입하는 상징적인정문(正門)으로, 남쪽에 있다하여 속칭 ‘남대문’이라 불렸습니다. 숭례문은 개성의 남대문, 평양의 보통문과 함께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성문 중 하나로 그 가치가 인정되어 1962년 12월 20일 국보 1호로 지정됩니다. 숭례문은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건축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5년 (1396)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된 이후 세종 29년(1447)과 성종 10년 (1479), 두 차례에 걸쳐 크게 수리된 이후 그 모습을 간직해 오다 일제강점기 직전인 1907년부터 1909년 사이에 일제에 의해 좌우 성벽이 헐리면서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습니다. 숭례문은 크게 석축(石築 또는 육축(陸築))과 문루(門樓)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석축은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두고 남쪽에 면하여 큰 문을 달았습니다. 문루는 2층으로 된 목조 건물로 동서 양쪽으로 작은 문을 두어 문루로 출입할 수 있게 하였으며, 2층은 바닥 전체가 마루로 되어 있고, 사방에 두터운 나무판으로 된 창문을 달았으며, 문루 2층 남쪽 중앙에는 ‘숭례문(崇禮門)’ 세 글자를 세로로 새긴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숭례문은 도성인 한양의 정문으로서 지니는 일상적인 기능 외에 도성의 정문이라는 상징성과 연관하여 몇가지 흥미로운 기능이 있었음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을 비롯한 문헌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숭례문은 종루(鐘樓)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는데 세종 7년 4월 흥천사의 종을 옮겨 와 숭례문에 건다는 기록이 있는데 숭례문의 종은 성문의 종과 함께 성문의 개폐를 알리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일출·일몰의 시차(時差) 관계로 계절에 따라 달랐으나 대개 밤 10시가 되면 28번의 종을 울려 문을 닫고 외부와의 통행을 막는 한편, 성내에서는 통행이 금지되었다가 새벽 4시경이 되면 33번의 종을 쳐서 통금을 해제하고 문을 열었습니다. 또한 숭례문은 풍수지리적 측면에서 적극적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태종 8년 7월 23일 에 오랜 비로 인해 한양의 사대문(四大門)에서 기청제를 지낸 이래 숭례문은 조선 시대 내내 기우제와 기청제를 지내는 용도로 자주 활용되었습니다. 이 밖에도 숭례문은 백성에게 국가의 시책을 보여주는 공개적인 장소로도 활용되었고, 임금이 직접 참관하여 반역자를 비롯한 국가적인 중죄인을 재판하고 참수 또는 효시하장소로 활용하였으며, 외국으로 가는 사신을 전송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을 접견하는 등 주요한 국가 행사가 열렸던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역사속의 숭례문

숭례문은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건축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숭례문은 태조 5년(1396)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되었는데, 이후 세종 29년(1447) 과 성종 10년(1479), 두 차례에 걸쳐 크게 수리된 적이 있으며, 특히 세종 때에는 지반이 낮아 더돋우어 축조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특별한 수리기록은 없으며, 조선 후기인 고종 때 성문 보수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한편 일제강점기 직전인 1907년에는 좌우 성벽 일부가 헐리기 시작하여 1910년에 주변 석축 등이 완성되었고, 이 때 숭례문은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 성벽 철거는 명목상으로는 교통통행량이 많은 숭례문 주변 도로를 확장 정비하는 것이었으나, 숭례문의 원형이 파괴되는 결정적 사건으로, 이후 주변의 전철과 교통 통행으로 인하여 발생되는 진동에 의해 지속적인 피해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일제 강점기 동안에는 물산공진회 장소 로도 사용되었고, 1930년대 중반부터는 홍예 내부로의 출입마저 금지되어 숭례문은 주변 도로에 의하여 섬처럼 고립되게 됩니다.
한국전쟁 중에는 숭례문 석축 전면과 문루 등이 피해를 입어 1952년에 긴급 보수가 진행되었고, 1961~1963년에 석축 일부와 문루 전체에 대한 해체수리가 진행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후 몇 번에 걸친 지붕 기와 교체공사와 단청 공사 등이 진행되었고, 2006년 3월에 주변 공원 조성사업 후 일반인에게 개방하였으나 그로부터 2년 후인 2008년 2월 10일, 숭례문은 방화에 의한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숭례문 석축은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두고 남쪽에 면하여 큰 문을 달았습니다. 조선시대에 이 문은 아침 저녁으로 열고 닫기를 반복하여, 도성으로의 출입을 통제하는 기능을 수행하였으며, 이 문의 남쪽면에 두터운 철갑을 덮고, 뒷면에는 가로로 길고 두터운 가로대를 달게 하여 왜적의 침략에 대비하였습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문루에 점화실(點火室)을 두어 전쟁시 불화살을 쏠 수 있도록 하였고 사방에 전돌로 담을 쌓아 바깥에서안을 보기 어렵게 하였는데, 이는 도성의 방어시설이 지니는 기본적인 특성이기도 합니다.

 

 

 

 

 

 

 

 

 

숭례문의 화재

창건 후 600여 년 동안 유지되어 오던 숭례문은 2008년 2월 10일 저녁 20시 50분경 토지보상 문제 로 불만을 품은 방화범의 시너와 라이터를 이용한 의도적인 방화에 의해 소실되었습니다. 다행이도 화재에 의한 피해가 문루 2층의 90%정도와 1층의 10%정도 소실에 그쳐 문화재위원회회의결과 홍예문과 석축이 온전하고 문루 1층도 90%이상 남아있어 국보 1호로써 지위를 유지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화재로 인한 문루의 피해 양상이 1층과 2층이 상이한데 이는 2층이 화재로 인해 불에타는 피해를 입은 반면 1층은 부재들이 낙하하면서 피해가 발생하여 주로 부러지거나 꺾이는 등의 피해를 입고 실제 불에 탄 부재는 거의 없었습니다.석축은 보이는 가시적 피해는 거의 없으며, 다만 다량의 소방수가 문루에 살수되어 이로 인해 석축 내부로 들어갔다가 빠져나가면서 석축 내부의 토사가 유출되었을 우려가 있었으나 이에 대해 구조안전성에 대한 평가 용역 결과 문제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다행이도 현판은 화재 진압 도중 소방대원에 의해 긴급하게 수습되어 화재에 의한 피해를 막았으나 긴급히 수송하는 과정에서 현판을 떨어뜨려 현판의 테두리목 등 일부 부재가 떨어져나가는 물리적 손상을 입었고, 이를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담당하여 복구 작업을 진행하였습니다.

 

 

 

 

복구개요

숭례문 화재 직후 문화재청에서는 추가붕괴를 막기 위해 신속히 현장을 수습하고 문화재 분야 전문가들의 자문과 회의를 거쳐, 숭례문의 가치를 최대한 유지하기 위해 기존 부재를 최대한 재활용하고 일제가 훼손한 부분도 바로잡는다는 원칙아래 다음과 같이 기본방침을 마련하였습니다.

첫째, 기존 부재를 최대한 사용하여 역사적 건축물의 가치 유지,
둘째, 일제에 의해 훼철된 좌우측 성곽과 원지반 복원,
셋째, 중요무형문화재 등 최고 기량의 기술자 참여,
넷째, 학계 등 원로 전문가로 복구 자문단 운영,
다섯째, 예산,기술지원,공사시행을 문화재청이 담당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숭례문 복구는 태조 7년(1398) 창건 당시 기록, 세종 29년(1447), 성종 10년(1479) 개축 관련자료 및 구한말 옛 사진자료 등 확보하고, 2006년 작성된「정밀실측도면」(18매을 기본으로 하여 1965년 발간된「수리보고서」를 참조하여 원형대로 복구를 추진할 것입니다.일제강점기 철거된 숭례문 좌우측 성곽은 훼손 이전 상태로 복원하고 원지반보다 1.6m 성토된 주변 지반은 발굴조사 후 원지형에 맞추어 복원하고, 이러한 사고가 재발되지 않도록 첨단 감지장치와 소화용 방재설비를 숭례문 현장에 맞게 반영될 수 있도록 검토 중에 있습니다.복구기간은 2008년부터 2012년까지 5년으로 수습단계, 조사 및 설계단계, 복구공사단계 등 3단계로 추진됩니다. 먼저 수습단계는 2008년 5월 완료하였고, 조사 및 설계단계는 2008년 6월부터 2009년까지 1년7개월 동안 숭례문 현판 복구, 발굴조사, 복구설계, 고증자료조사가 추진되고, 복구공사단계는 2010년부터 2012년까지 3년간 문루해체 및 복구, 육축보수 및 좌우성벽 복원, 문루 단청, 주변 환경정비를 거쳐 준공하게 됩니다.

 

 

 

 

 

복구현

숭례문 화재 이후 현장에서는 추가 붕괴위험 부재를 해체하는 등 신속히 현장을 수습하는 한편 피해현황을 기록하기 위하여 실측작업을 실시하였습니다. 피해 부재는 부재의 특성에 따라 분류 정리하여 2008년 5월말까지 경복궁내 부재보관소로 운송하였고, ‘숭례문화재 피해현황 및 수습 보고서’를 2008년 5월말 발간하는 것으로 수습 단계를 마무리 하였습니다.이후 2008년 6월부터 2009년 12월까지 숭례문 복구공사 준비를 위해 다음과 같은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먼저 2008년 한해 국민들께서 기증의사를 밝힌 소나무 166건 중 80건에 대해 현지조사,법률 검토 등을 거쳐 선별된 소나무 입목 21주와 원목 338개 기증받아 2009년 2월에 벌채,운반 하여 경복궁내 목재보관소에서 건조 중에 있습니다. 이는 숭례문의 대들보, 기둥 등 중요한 부재로 쓰여 질 것이며, 상량문 등 주요복구 기록에 남겨질 것입니다.

 

 

 

 

 

 

 

 

 

 

 

 

 

 

 

 

 

 

 

 

 

 

 

 

 

 

 

 

 

 

 

 

 

 

 

 

 

 

 

 

 

 

 

 

 

 

 

 

 

 

 

 

 

 

 

 

 

 

 

 

 

 

 

 

 

 

 

 

 

 

 

 

 

 

 

 

 

 

 

 

 

 

 

 

 

 

 

 

 

복원에 필요한 목재

조선태조 이성계 5대조 묘소인 삼척시 준경묘역 내 소나무 10주를 벌채하여 경복궁 목재보관소에 옮겨 놓았으며 앞으로 2년 여간 자연 건조를 거쳐 숭례문 복구에 사용 될 것으로 목재 수급은 큰 어려움 없이 확보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숭례문 복구공사에 앞서 숭례문 주변 지형의 변화를 확인하기 위하여 2008년 6월부터 2010년말까지 발굴조사가 진행됩니다.2008년 1차 발굴조사 결과 숭례문 앞뒤에 깔았던 박석을 통해 조선후기 도로를 확인하였고, 조선전기~대한제국시기 건물터와 숭례문 동서 성벽의 기초를 확인하는 성과가 있었습니다. 또한, 소방대원에 의해 긴급하게 수습된 현판은 지난해 양녕대군 사당인 지덕사(至德祠)에 소장된 숭례문현판 탁본자료를 제공받아 진위를 확인한 결과 한국전쟁 이후 잘못 수리된 부분을 확인하여 이를 바로잡아 복구 완료하였습니다.

 

 

 

 

 

한편 숭례문 복구공사 설계는 여러 조사연구들을 반영하여 작성하고 있습니다. 손상 목부재에 대한 재사용 가능성을 검토하여 국보 1호의 진정성을 확고히 하고, 육축에 대한 구조안전성 검토를 거쳐 육축 보수에 대한 기초자료를 작성하고, 또한 공장제작 기와 사용에 따른 지붕 하중 증가로 발생하는 구조적 문제를 보완하기 위하여 전통공법을 활용한 기와 제작 방안에 대해서도 연구하여 반영할 계획입니다. 또한, 이와 같이 설계시 제기되는 과제들을 숭례문 복구자문단의 자문과 공청회 등을 통하여 문화재 분야 전문가들의 충실히 검토를 거쳐 해결해 나갈 예정입니다.참고로 2009년 2월 10일 숭례문 화재 1주년을 맞아, 한달간 국민과 함께 숭례문 참화의 교훈을 되새기고 완벽한 복구를 바라는 염원과 희망을 담는 뜻으로 ‘숭례문-기억,아쉬움 그리고 내일’이라는 제목으로 개최하였습니다. 이 중 주목할 것은 전시 유물 중 1926년 남지 터에 건물을짓기 위해 지하공사를 하던 중 발견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해온 ‘남지출토 청동용두의 귀(靑銅龍頭의 龜)’가 최초로 공개되었는데몸통에서 불 화(火)를 물 수(水)로 둘러 적은 종이 유물이 나와서 이 청동거북을 남지에 넣었던 조상들의 뜻을 짐작케 할 수 있었습니다.

 

 

 

 

 

 

 

 

 

 

 

 

승례문 대장간 전통철물 제작사업

승례문 전통철물 제작사업은 현재 단절된 전통 방식에 의한 건축용 철물 제작을 통해

승례문으 복구함으로써 승례문 복원 타당성 중대, 전통 철물제작 문화계승 및

기술력 확보를 실현하여 국민의 관심유도 및 교육적 효과를 중대하는데 있다.

승례문 대장간에서는 승례문 복구에 소요되는 철물 및 건축 도구 등을 제작할 예정이다.

복구물량은 현재 승례문 복구과정에서 확인된 연정 등 약 2,470점이다.

 

 

 

 

 

 

 

 

 

 

 

 

 

 

 

 

 

 

 

 

 

 

 

 

서울 숭례문 (서울 崇禮門) 국보 제1호

공개 기간 09년 8월 15일 ~ 2012년 (복구 완료시까지)

공개일 : [ 토요일, 일요일 ] 1회당 관람인원 및 소요시간 : [ 40명 (현장접수 : 5명), 45분 ]

관람 신청 사이트(www.sungnyemun.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