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탐방/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 (水原 華城) 사적 제3호

2012. 1. 14. 06:30전국 문화재와 박물관/국가지정 문화재

[문화재탐방/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 (水原 華城) 사적 제3호

 

화성은 서쪽으로는 팔달산을 끼고 동쪽으로는 낮은 구릉의 평지를 따라 쌓은 평산성이다.
정조는 그의 아버지 장헌세자에 대한 효심에서 화성으로 수도를 옮길 계획을 세우고, 정조 18년(1794)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796년에 완성하였다. 실학자인 유형원과 정약용이 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쌓았다.
성벽은 서쪽의 팔달산 정상에서 길게 이어져 내려와 산세를 살려가며 쌓았는데 크게 타원을 그리면서 도시 중심부를 감싸는 형태를 띠고 있다. 성안의 부속시설물로는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들이 있었으나, 현재에는 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특히 다른 성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창룡문·장안문·화서문·팔달문의 4대문을 비롯한 각종 방어시설들과 돌과 벽돌을 섞어서 쌓은 점이 화성의 특징이라 하겠다.
화성은 쌓은 후 약 200여년이 흐르는 동안 성곽과 시설물이 무너지기도 하고 특히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파손되었는데, 1975년부터 보수,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효심에서 근본이 되어 당파정치 근절과 왕도정치의 실현 그리고 국방의 요새로 활용하기 위해 쌓은 화성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를 갖고 있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글출처~문화재청

 

 

 

 

방화수류정 밖 용연

국가지정문화재(보물) 지정을 앞둔 방화수류정 밖 용연(龍淵)을 원형 복원하였다.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은 지난 1794년(정조18년) 주변감시와 지휘 등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화성의 한 정자이며 용연은 북성 밖에 있는 반달모양의 연못이다.

1937년 3월 용연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변형된 부분을 화성 성곽 축조 과정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를 근거로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암문(暗門)
성곽에는 흔히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알지 못하는 출입구를 내어 사 람이나 가축이 통과하고, 양식 등을 나르도록 하는데 이것이 암문이 다. 수원성에는 모두 다섯 곳에 암문이 설치되어 있는데 곧 북암문 ,동암문,서암문,서남암문,남암문이다. 북암문은 동북 각루 남쪽 약간 골짝이진 곳에 있어서 성밖에서는 눈 에 잘 띄지 않는다. 성벽에 따로 전돌로 벽을 쌓고 6척5촌, 너비 4척 의 아치문을 내고 그 위에 성가퀴를 나들었다.

 

 

 

 

수원 방화수류정(보물 제1709호)

수원 방화수류정(보물 제1709호)은 조선 정조 18년(1794)에 건립됐으며 화성의 동북각루인 전시용(戰時用) 건물이다. 그러나 정자의 기능을 고려해 석재와 목재, 전돌을 적절하게 사용해 조성했다. 평면은 'ㄱ'자형을 기본으로 북측과 동측은 凸형으로 돌출, 튀어나오게 조영해 사방을 볼 수 있도록 꾸몄다.
주변감시와 지휘라는 군사적 목적에 충실하면서 주변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조선시대 정자건축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으로 가치가 크다. 다른 정자에서 보이지 않는 독특한 평면과 지붕 형태의 특이성 등을 토대로 18세기 뛰어난 건축기술을 보여준다.

 

 

 

 

 

 

 

 

 

 

 

 

 

 

 

 

 

북수문(화홍문)

수원화성의 북수문이며 남북으로 흐르는 수원천의 범람을 막아 주는 동시에 방어적 기능까지 갖추고 있다. 화강암으로 쌓은 다리 위에 지은 문이다. 7개의 홍예문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으로 지어져 있으며 누각의 건축면적은 52.89㎡이다. 누상에 오를 때에는 좌·우 측면에 있는 돌 계단을 이용한다. 7개의 홍예문 중에 중앙의 1칸만이 높이와 폭이 크고 나머지는 모두 같다. 수문의 바깥쪽에는 철전문을 설치하여 적의 침투를 막았다. 7개의 수문을 통하여 맑은 물이 넘쳐 흘러 물보라를 일으키는데, 현란한 무지개가 화홍문을 한층 더 아름답게 한다. 이를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 하여 수원 8경 중에 하나로 꼽는다. 1794년(정조 18) 음력 2월 28일 터 닦기 공사에 착수하여 1795년(정조 19) 정월 13일 문루가 준공되었다.

 

 

 

 

 

 

 

 

장안문

하나의 홍예문(虹霓門) 위에 2층 누각을 올리고, 바깥 쪽으로 원형 옹성(甕城)을 갖추었다. 홍예 위로 4개의 누조(漏槽)를 설치하고, 성벽 위에는 안팎에 총구(銃口)를 갖춘 여장(女墻)을 쌓았다. 홍예 위에는 오성지(五星池)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5개의 구멍을 갖춘 큰 물통으로, 적이 성문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문 좌우로 성벽이 이어지며, 문에서 53보(步) 되는 곳에 각각 적대(敵臺)가 마련되어 있다.
이 문은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성문 형태를 취하였고, 규모나 구조는 조선 초기에 세워진 서울 숭례문과 매우 비슷한, 당당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숭례문에 비해 좀더 새로운 것은 옹성, 적대와 같은 방어 시설을 갖춘 것이 특색이다.
1920년대 수원시 시가지계획사업으로 문 좌우의 성벽이 헐리고, 1950년 6·25전쟁 때 폭격으로 누각이 소실되었다가, 1978년 문루는 원래대로 복원되었다.

 

 

 

 

 

 

 

 

 

 

 

화성 적대 []

화성(, 사적 제3호)의 성문과 옹성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성문의 좌우 옆에 있는 치성() 위에 설치한 방어시설물이다. 성곽의 중간에 약 82m의 간격을 두고 성곽보다 다소 높은 대를 마련하여 화창이나 활, 화살 등을 비치하고 적군의 동태와 접근을 감시하였다.
포루와 치성은 성곽 밖으로 완전히 돌출된 반면 적대는 반만 성곽 밖으로 돌출되고, 반은 성 안으로 돌출되어 있다. 화성에 설치되었던 적대는 총 4개로, 팔달문에 남동적대와 남서적대, 장안문에 북동적대와 북서적대가 있었는데 2008년 현재 북동적대와 북서적대만 복원되어 있다.


 

 

 

 

 

 

 

 

 

 

 

 

 

 

 

수원 서북공심돈 (水原 西北空心墩) 보물  제1710호

화성의 화서문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 정조 20년(1796)에 건립되었다.
수원 서북공심돈은 화성 서북측 성벽에서 돌출시켜 남측면의 일부만 성곽에 접하고 나머지 3면이 돌출된 평면을 이루고 있다.
3층 구조로 하부 치성(雉城)은 방형의 석재를 사용하였고 1층과 2층 외벽과 3층 하부는 전돌로 쌓았다.
1, 2층 각 면에는 6개의 총안(銃眼)이 있으며, 3층에는 여장(女墻)을 쌓고 같은 높이에 4개의 총안을 내었다. 3층 포루(鋪樓)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지붕으로 벽면 위쪽의 판문에는 전안(箭眼)이 설치되어 있다.
치성의 북측면과 서측면에는 각 2개소의 현안(懸眼)을 두어 성에 접근하는 적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하였고, 하부는 성벽의 석재를 오목하게 “∪”자형으로 가공하여 상부 전돌 현안과 연결되게 하였다.
수원 서북공심돈의 성제(城制)는 현존 성곽 건축에서는 화성에서만 볼 수 있는 것으로 재료의 유연성과 기능성이 우수하며, 치성의 석재 쌓기 기법과 상부 공심돈의 전돌 축조 기법, 현안과 총안, 전안 등의 중요한 시설 등 독창적인 건축형태와 조형미를 가지고 있다.

 

 

 

 

 

 

 

 

 

 

 

 

 

 

 

 

수원 화서문 (水原 華西門) 보물  제403호

수원성은 조선 정조 18년(1794)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정조 20년(1796)에 완성한 성곽이다. 중국성의 모습을 본뜨기는 했지만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을 쌓아 훨씬 발달한 모습을 하며 한국 성곽을 대표하는 뛰어난 유적이다.
화서문은 수원성의 서쪽문으로 문의 모든 시설과 크기는 동쪽의 창룡문과 거의 같은 구조로 되어있다. 네모 반듯한 큰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축대 위에 1층의 건물을 세웠는데,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기둥 사이는 모두 개방되어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 건물이고, 축대의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과 문의 앞쪽에 벽돌로 쌓은 반달모양의 옹성이 있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지키기 위한 구실을 하며 2중의 방어 효과를 갖는다.
또한 주위를 돌아가며 총이나 활을 쏘는 구멍이 뚫린 낮은 담을 쌓아 보호되도록 하였다. 옹성의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공심돈이 성벽을 따라서 연결되어 있다. 공심돈은 속이 텅 비었다는 뜻으로 지금의 초소 구실을 하던 곳이다. 안에는 계단을 따라 오르내릴 수 있고 층마다 바깥을 향해 총이나 활을 쏠 수 있도록 구멍이 있어 철저한 방어가 되도록 하였다.
한국의 다른 성곽 건축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시설로서, 구조도 특이하며 화서문을 중심으로 일대의 경치에 한층 더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수원 화성 (水原 華城) 사적 제3호

경기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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