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종묘 (宗廟) 사적 제125호

2012. 2. 4. 06:30전국 문화재와 박물관/국가지정 문화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종묘 (宗廟) 사적 제125호

 

종묘는 조선왕조의 왕과 왕비, 그리고 죽은 후 왕으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이다. 종묘는 본래의 건물인 정전과 별도의 사당인 영녕전을 비롯하여 여러 부속건물이 있다.

태조 3년(1394)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에 완성되었다. 태조는 4대(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추존왕을 정전에 모셨으나, 세종 때 정종이 죽자 모셔둘 정전이 없어 중국 송나라 제도를 따라 세종 3년(1421) 영녕전을 세워 4대 추존왕의 신위를 옮겨 모셨다.

정전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08년 다시 지었고, 몇 차례의 보수를 통해 현재 19칸의 건물이 되었다. 정전에는 19분의 왕과 30분의 왕후를 모시고 있다. 영녕전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1608년 다시 지었다. 현재 16칸에 15분의 왕과 17분의 왕후 및 조선 마지막 황태자인 고종의 아들 이은(李垠)과 부인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 앞 뜰에는 조선시대 83명의 공신이 모셔진 공신당이 있고, 중요무형문화재인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이 전해진다.

종묘는 동시대 단일목조건축물 중 연건평규모가 세계에서 가장 크나, 장식적이지 않고 유교의 검소함이 깃든 건축물이다. 중국의 종묘가 9칸인데 비해 19칸의 긴 정면과 수평성이 강조된 건물 모습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독특한 건축물이며, 동양 고대문화의 성격과 특징을 연구하는데 필요한 귀중한 자료가 담긴 유산이다. 종묘의 정전과 영정전 및 주변 환경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종묘제례와 음악·춤의 원형이 잘 계승되어,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종묘< 宗廟 >는 조선시대 역대< 歷代 > 왕< 王 >과 왕비< 王妃 > 및 추존< 追尊 >된 왕과 왕비의 신주< 神主 >를 모신 사당이다.

56,503평의 경내에는 종묘 정전< 正殿 >을 비롯하여 별묘< 別廟 >인 영녕전 < 永寧殿 >과 전사청< 典祀廳 >, 재궁< 齋宮 >, 향관청< 享官廳 > 및 공신당< 功臣堂 >, 칠사당< 七祀堂 > 등의 건물이 있다.

종묘는 태조 3년(1394) 10월 조선 왕조가 한양(서울)으로 도읍을 옮긴 그해 12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9월에 완공하였으며, 곧이어 개성으로부터 태조의 4대조인 목조< 穆祖 > 익조< 翼祖 > 도조< 度祖 > 환조< 桓祖 >의 신주를 모셨다. 정전은 처음에 태실< 太室 > 7칸, 좌우에 딸린 방이 2칸이었으며 명종< 明宗 >때 4칸을 증축하여 태실 11칸이 되었는데, 선조< 宣祖 > 25년(1592) 임진왜란< 壬辰倭亂 > 때 불타버려 광해군< 光海君 > 즉위년(1608) 에 다시 고쳐 짓고, 그후 영조< 英祖 > 헌종< 憲宗 > 때 각각 4칸씩 증축하여 현재 태실 19칸으로 되어 있다.

영녕전은 세종 3년(1421)에 창건하여 처음에는 태실 4칸, 동서에 곁방 각 1칸씩으로 6칸의 규모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광해군 즉위년에 10칸의 규모로 고쳐 지었으며 그후 계속 증축하여 현재 16칸으로 되어 있다.

현재 정전에는 19실에 49위, 영녕전에는 16실에 33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고, 정전 뜰앞에 있는 공신당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정전에서 매년 춘하추동< 春夏秋冬 >과 섣달에 대향< 大享 >을 지냈고, 영녕전에서는 매년 춘추와 섣달에 제향일< 祭享日 >을 따로 정하여 제례를 지냈으나, 현재는 전주이씨< 全州李氏 > 대동종약원< 大同宗約院 >에서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을 정하여 종묘제례를 올리고 있는데, 종묘제례 < 宗廟祭禮 >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 종묘제례악 < 宗廟祭禮樂 >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정전< 正殿 >은 국보 제227호, 영녕전< 永寧殿 >은 보물 제821호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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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하마비 [下馬碑] 

 1663년(현종 4년) 10월에 세운 것으로 앞을 지날 때에는 신분의 고하(高下)를 막론하고

  누구나 타고 가던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새긴 석비(石碑).

 

 

 

 

외대문(정문)

종묘의 정문은 남쪽에 사묘(祠廟)의 표문(表門)답게 정면 세 칸의 평삼문(平三門)으로 되었고, 정문 좌우로는 종묘외곽을 두르는 담장과 연결되어 있다. 정문 안 서쪽으로는 본래 종묘를 지키는 수복방이 있었다. 정문은 원래 전면 중앙에 난 계단으로 오르내리게 되어 있었는데, 일제시대에 도로를 조성하면서 도로 면이 높아지게 되어 땅에 묻히고 지금은 단벌의 장대석 기단만 있다.
종묘 정문은 외대문(外大門) 또는 외삼문(外三門)이라고도 한다. 정문은 궁궐 정문과는 달리 구조 형태가 아주 검박하고 단순하다. 정문밖에는 하마비(下馬碑)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된 어정(御井)이 있다.

 

 

 

지당(池塘)

종묘 망묘루 앞에 연못이다. 사각형으로 되어 있으며 연못 가운데에는 둥근 인공섬이 있다. 둥근 것은 하늘을 말하고 네모난 것은 땅을 말한다. 이른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이다. 대부분 궁궐의 지당에는 소나무가 심어져 있으나 종묘에는 향나무가 심어져 있다. 궁궐 같으면 연못에 정자를 두어 사람(人)의 역할을 하도록 했다. 그래야 천지인의 구색이 맞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묘는 궁궐과 다르기 때문에 굳이 정자를 둘 필요가 없다. 종묘의 주인은 혼령이며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망묘루

향대청 남쪽에 위치하는 망묘루는 제향(祭享)때 임금이 머물면서

사당을 바라보며 선왕(先王)과 종묘사직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망묘루는 건물 중 한 칸이 누마루로 되어 있다.

 

 

 

재궁

정전 동남쪽에 위치한 재궁은 어숙실이라고도 하며 국왕이 제사를 준비하던 곳이다.
재궁 북쪽에는 임금이 머무는 어재실, 동쪽에는 세자가 머물던 세자재실(世子齋室)이 있고,

서쪽에는 어목욕청(왕이 목욕하는 건물)이 있다.

 

 

 

 

 

전사청

전사청은 종묘제사에 사용하는 제수의 진찬 준비를 하던 곳으로,

뜰을 가운데 두고 그 주위로 건물을 ㅁ자형으로 배치하였다.
주실은 정면 7칸, 측면 2칸이고 옆에 온돌과 마루방을 들여 행각으로 꾸몄다

 

 

 

 

 

 

 

종묘 정전 (국보 제227호)

종묘 정전은 매칸마다 신위를 모신 신실인 감실 열아홉 칸, 신실 양 옆으로 각각 두 칸의 협실, 그리고 협실 양 끝에서 직각으로 앞으로 꺾여 나와 마치 신실을 좌·우에서 보위하는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동·서월랑 다섯 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문인 신문에서 보면 동서 109미터, 남북 69미터나 되는 묘정 월대가 넓게 펼쳐있고, 월대 가운데에는 신실로 통하는 긴 신로가 남북으로 나 있으며, 그 북쪽 끝에 상월대와 기단이 설치되어있다. 종묘 건축이 다른 건물과 다른 점은 건물 내부에 모실 신위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몇 차례에 걸쳐 건물을 옆으로 증축하여 길게 늘린 점에 있다.

 

 

 

옆에서 본 종묘 정전 회랑.

 

 

 

 

 

 

종묘 정전의 뒷면

 종묘 정전의 뒷면은 벽으로만 이루여져있다. 창문이 없는것은 혼령들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정전 신실로 오르는 계단에 구름과 무지개 형상을 조각하여 놓았다.

구름을 타고 무지개를 건너가야 조상신을 만날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진다.

 

 

 

 

 

 

 

 

 

 

 

 

공신당

조선 왕조 역대 공신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정전 울타리 안 월대 남쪽의 동쪽에 있으며 창건 때는 5칸에 불과하였으나 나중에 9칸으로 늘렸다가 지금은 16칸의 긴 건물로 되었다.
칠사당과 같은 구조 형식으로 매우 간소하게 되어 있는데 왕의 신실과 한 울타리 안에 있어서 일부러 그 형식을 낮추었다고 생각되며 16칸이라는 보기 드문 건축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정전에 와서도 자칫 그냥 지나치기 쉬운 건물이다.

 

 

 

 

 월대(月臺)

궁중의 각종 행사가 있을 때 이용된다. 대개 방형의 넓은 단(壇)으로, 그 위에 지붕이나 다른 시설을 하지 않는다. 월견대(月見臺) 즉 달을 바라보는 대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전하고 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월대는 궁궐에서의 하례(賀禮)·가례(嘉禮)와 같은 큰 행사 때 사람들이 올라서서 행사에 참여하는 데 이용되며 제례(祭禮) 때에도 이용된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시대 이전의 월대는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우며 조선시대 각 궁궐의 외정전(外正殿) 및 내정전(內正殿)의 앞, 그리고 종묘(宗廟) 정전 및 영녕전(永寧殿)의 앞에서 그 실례를 볼 수 있다.

종묘 정전은 본래 정면 7칸으로 지어졌지만 봉안해야 할 역대 임금의 신위가 늘어남에 따라 건물도 옆으로 계속 증축하게 되어 마지막에는 19칸의 긴 건물이 되었는데 이에 따라 건물 앞의 월대 역시 규모가 확장되어 장대한 규모로 되었다. 상하 2중으로 구성되었으며 바닥에는 전면에 박석이 치밀하게 깔려 종묘 정전의 엄숙한 건축구성과 함께 일대 장관을 이룬다.

이 월대에서는 제례가 거행될 때 이른바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으로 알려진 <보태평 保太平>과 <정대업 定大業>의 음악이 연주되고 춤이 벌어지는데 여기에는 각종 악공과 무인(舞人) 들이 동원되어 월대를 가득 메우게 된다.

 

 

 

 

 종묘대제 봉행

종묘제례 및 제례악은 2001년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 2008년부터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으로 관리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인 종묘에서 개최되는 행사로 유형과 무형의 세계유산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문화유산이다. 종묘제례는 왕조의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로 조선왕조의 제사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종묘대제(宗廟大祭)라고 한다. 고대중국에서 비롯되어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고려와 조선조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유구한 역사를 이어 내려온 소중한 조상전래의 제례의식이다. 조선조에는 춘하추동 사계절과 섣달에 행하였으며 1969년 대동종약원에 의해 복원되어 지금은 매년 5월 첫째주 일요일에 봉행되고 있다.

종묘대제에는 종묘제례가 봉행되며 각 제사의례에 맞추어 경건한 분위기를 고양시키기 위한 음악과 무용으로서 종묘제례악이 따른다. 제례는 신을 맞이하는 영신례(迎神禮), 초헌, 아헌, 종헌례에 이어 음복례가 행해지고, 신을 보내 드리는 송신례(送神禮)를 갖춘 후에 축(祝)과 폐(幣)를 망료(望燎) 위에 불사르는 것으로 끝난다. 종묘제례악은 우리 고유의 음률로 왕조의 창업과 기상을 노래하고 있으며 모든 행사의 순서에 맞추어 춤과 음악이 조화를 이룬다. 엄숙한 제사 의례만큼이나 장엄미가 돋보이는 종합예술로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크며 동양에서도 드물게 남아 있는 고전음악이다.

 

 

 

영녕전 (보물 제821호)

영녕전은 신실 하나하나의 구성은 정전과 크게 다름이 없지만 부재의 크기가 정전보다 약간 작고 전체 건물 규모도 정전보다 작기 때문에 정전에서와 같은 장대함을 느끼기에는 뒤지는 감이 있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공간이 한눈에 쉽게 들어와 친근감을 더해 준다.
네모난 아랫부분에 원형 주좌를 둔 주춧돌에 둥근 기둥과 간단한 초각을 한 익공을 짜고, 퇴칸 안에 두 짝 판문을 달고 뒤는 화방벽으로 쌓고 서까래는 부연 없는 홑처마로 꾸미는 등 세부 구성은 정전과 거의 같으며 역시 부재 표면도 단청 없이 간단히 주칠로 마감하였다.

정전과 좌우 익실 앞으로 동·서월랑이 뻗어 나와 ㄷ자 형태를 이루고 있고 박석을 덮은 상·하월대가 울타리를 가득 메우는 점도 동일하다. 이곳은 부재의 처리나 건물의 규모가 전체적으로 종묘 정전보다는 작지만 건축 공간 자체의 장엄한 공간 구성은 여기서도 잘 나타나고 있으며 질박하면서도 친근감 있는 장인들의 솜씨는 이곳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