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독립운동가 안중근의사를 기리는 기념관

2012. 3. 9. 11:30우리 문화예술 공연전시 /문학관,미술관,기념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독립운동가 안중근의사를 기리는 기념관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哈爾濱]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독립운동가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를 기리는 기념관이다. 1970년에 세워져 사단법인 안중근 의사 숭모회에서 운영하던 舊 기념관은 철거 되고, 2010. 10. 26일 새 기념관이 개관 되었다. 새 기념관은 대지 5,772㎡ 연면적 3,759㎡(약 1,200평)에 지상 2층 지하 2층 규모로 전시실 12개를 비롯, 강당(260석), 자료실, 휴게실 등 이 배치되고 총공사비 180억원 중 146억원 국고부담, 나머지는 각계각층의 국민성금으로 충당 하였다.
그밖에 안의사가 남긴 붓글씨, 관련 사진, 건국공로 훈장과 서한, 공판 당시 신문 보도 내용, 유명 인사 휘호 등이 전시되어 있다. 기념관 내부에는 사단법인 안중근 의사 숭모회 사무실이 있어 안중근 의사에 대한 각종 유물과 자료를 발굴 수집하고 매년 기념식과 학술 심포지엄, 해외 독립운동 사적지 탐방, 서예 백일장 등의 행사를 개최한다. 무료입장이며 개관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겨울철에는 5시)까지이며, 입장은 종료 1시간 전까지 가능하다. 주변에는 남산도서관과, 서울시 교육연구정보원, 백범광장이 인접해 있고, 5분거리에 남산 케이블카 승강장이 있다. 현재 서울시 주관 남산 르네상스 계획에 의해 서울성곽이 복원중에 있으며, 안중근의사 기념관 앞은 성곽 상징물로 대치할 예정이다. 매주 월요일과 설. 추석 연휴는 휴관임.

 

 

 

 

 

안중근의사께서는 1910년 3월 만주 여순감옥에서 일제에 의해 순국하였으나, 우리 정부는 조국이 광복을 이룬 후에도 6.25전쟁과 4.19혁명, 5.16군부 쿠테타 등 격동기를 거치면서 안중근의사에 대해 이렇다 할 위훈을 기리지 못한 채 많은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중 1970년 서울 남산 현 위치에 안중근의사기념관을 건립 개관하게 되었으며, 세월이 흘러 기념관이 노후 협소해짐에 따라 舊 기념관은 철거하고 새 2010. 10. 26일 새 기념관이 개관 되었다.

 

 

 

 

안중근의사의 대형 좌상이 있어 입장시 참배하는 곳이며, 각종 기념식, 세미나 등을 할 수 있는 종합 공간입니다

 

 

 

 

 

 

안중근의사와 시대적 배경

1876년 강화도조약에서 1905년 을사늑약까지 30년간 조선은 국난의 위기를 겪었습니다. 임오군변(1882), 을미사변(1895), 러일전쟁(1904) 등의 격변을 거치면서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해 갔습니다. 구국을 위한 계몽운동과 의병투쟁에도 불구하고 1905년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이 강제되면서 한국은 사실상 식민지 상태에 놓이고 말았습니다. 안중근의사는 이러한 역사의 소용돌이 와중인 1879년 9월 2일 태어났습니다

 

 

 

 

안중근의사와 천주교

안중근의사는 1897년 천주교에 입교한 이후 수년간 천주교를 전파하는 한편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계몽운동을 펼칩니다.

 

 

 

 

을사늑약과 해외망명계획

안의사는 항일운동의 터전을 마련하고자 중국의 산둥.상하이 등지를 시찰합니다.

 

 

 

 

교육운동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운영하는 등 조국과 민족을 되살리기 위해 활발한 교육활동을 펼칩니다.

국채보상운동

1907년 안의사는 국채보상회 관서지부 설치 등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동의단지회

1909년 초 11명의 동지들과 ‘국가를 위하여 몸을 바치고 일심단체하여 국권을 회복’ 하고자 단지동맹을 맺습니다

 

 

 

 

하얼빈 의거

1909년 10월 안중근의사는 이토의 하얼빈 방문 소식에 우덕순,조도선,유동하의 의거를 계획하고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합니다.

 

 

 

 

 

 

 

안중근의사의 법정투쟁

안중근의사는 하얼빈의거가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거행된것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러나 일본 법정은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언도합니다.

 

 

 

 

 

 

 

 

 

 

옥중에서 남긴 글

5개월 동안 뤼순감옥에서 자서전「안응칠 역사」와 한국 독립을 위해 나아갈 길을 제시한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셨습니다.

 

 

 

 

 

 

 

안중근의사의 순국

1910년 3월 26일 순국한 안중근의사는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자신의 몸과 집안을 돌볼 겨를 없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고, 이는 한국 독립운동의 방향을 밝혀주는 등불이 되었습니다.

 

 

 

 

옥중유묵 상설전시

1910년 2월과 3월 뤼순감옥 내에서 쓴 옥중유필은 약 200여 점에 달하며, 한국과 중국, 일본 등에 산재해 있습니다. 안중근의사의 것으로 밝혀진 것은 57점이며, 이 중 26점이 국가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안중근의사기념관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5가 471-2번지 소월로91

02-3789-1016

http://www.ahnjunggeun.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