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의 역사와 민속을 한눈에 볼수있는 진도 역사관

2012. 3. 14. 18:00전국 방방곡곡 여행지/전라도 여행지

 

 

진도의 역사와 민속을 한눈에 볼수있는 진도 역사관

 

전남 진도 의신면 사천리에 위치한, 진도의 역사와 민속을 소개하는 전시실로

2003년 개관한 진도역사관은 역사관, 기획전시실, 영상실, 수장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사시대 이후 진도의 역사유물을 전시하고 민속, 자연환경 등을 소개함으로써

 유물과 관광의 보고인 진도의 역사를 알리고 계승·발전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

전라남도 진도 지역 고유의 역사유물을 영구히 보존함으로써 후세들의 사교육장으로 활용하고,

또 도서문화와 유배문화가 어우러진 독특한 민속유산을 보존하고 널리 알리기 위해 설립되었다

 

 

 

 

 

 

진도역사관은 역사관, 기획전시실, 영상실, 수장고로 나뉘어 있다.

역사관은 다시 ‘선사·고대실’, ‘삼별초 항쟁’, ‘유배문화실’,

‘역사의 발자취’, ‘향토문화실’, ‘무형문화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관의 전시물은 선사시대 이후 진도의 역사를 연대기에 따라 정리해 놓았고,

진도 지역의 역사유물과 남도석성, 용장산 전투, 명랑대첩, 유배문화 모습 등을

섬세한 모형을 통해 재현해 놓고 있다. 향토문화실에서는 베틀·농기구 등

다양한 생활도구를 기증받아 전시하면서 진도의 풍속을 소개하고 있다.
기획전시실(향토작가 전시실)에서는 진도 출신 작가들의 서화작품 및 허백련,

하철경, 박행보 등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또 영상실에서는 대화면을 통해

진도의 역사와 현황, 민속과 자연환경 등 선사시대 이후 진도 사람들의 삶을 소개하고 있다.

 

 

 

 

 

 

 

 

 

 

고려함선

 

 

 

 

 

진도 용장성 (珍島 龍藏城) 사적  제126호

배중손이 이끌던 삼별초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여 항쟁을 벌였던 장소이다.
고려 고종 18년(1231)부터 침략해 오던 몽골과의 전쟁을 벌이기 위해 고려는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로 옮겼다. 그리고 40여 년 동안 삼별초가 중심이 되어 몽골과의 전쟁을 벌였으나, 원종 11년(1270) 고려가 몽골에 항복을 하였다. 몽골에 대한 항복을 받아들일 수 없던 배중손을 비롯한 삼별초는 왕족인 승화후 온(承化候溫)을 왕으로 삼아 남쪽으로 내려와 이곳에 궁궐과 성을 쌓고 몽골과의 전쟁을 계속하였다. 이때 쌓은 성이 바로 용장성이다.
지금은 용장산 기슭에 약간의 성벽이 부분적으로 남아있으며, 성 안에는 용장사가 있던 절터와 궁궐의 자리가 남아있다. 용장성 안에는 성황산이 있는데, 이 산에도 산성을 쌓은 흔적이 보인다.
성이 만들어진 연대가 확실하고, 고려의 왕실과 대립되는 궁궐이 만들어진 점에서 가치있는 유적이다.


 

 

 

 

고려 삼별초의 근거지였던 용장산성 행궁터

용장산성은 돌로 쌓은 성으로 삼별초가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존재했다.

 

 

 

 

진도 금갑진성

조선시대의 수군진(陣)으로 남해와 서해를 잇는 주요 해상교통로에 위치하였으며, 왜구를 막는 전략상의 요충지로 조선 수군만호가 지휘하는 수군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성벽은 돌로 쌓은 석성이며, 축조된 시기는 1485년에서 1499년 사이로 추정된다. 현재 잔존하고 있는 성곽은 성의 서측부와 북측부이다.
현재는 금갑진성의 대부분이 훼철된 상태이며 흔적만 확인되는 성의 북측 성벽과 서측 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다. 현재 가장 양호하게 보전된 부분은 북측 성벽으로, 길이 약 25m, 높이 3.5m 정도로 마을 주민의 집 담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금갑진지도』에 나타나는 건물 중 현존하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4기의 만호비가 남아 있다.


 

 

궁녀둠벙

삼별초가 추대했던 왕족 출신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은 지금의 의신면 침계리에 있는 ‘왕무덤재’에서 붙잡혀 ‘논수골(論首谷)’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전투중에 피난중이던 궁녀들은 창포리에서 만길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만길재’를 넘다 몽고군에게 붙잡혀 몸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자 언덕을 따라 내려가 지금의 둠벙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이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망할 당시 3천 궁녀가 부여 낙화암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는 내용과도 매우 흡사한 사건이기고 하다.

· 그 뒤 비가 오는 날이면 이곳 둠벙에서 여인네의 울음소리가 구슬피들려와 20여년 전까지만해도 밤에는 이곳을 지나는 이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당시 이곳 둠벙의 수심은 매우 깊어서 절굿대를 넣으면 우수영 또는 금갑 앞바다로 나온다는 전설도 간직하고 있다.

 

 

 

 

용장산성전투

몽고의 침입으로 삼별초는 용장산성과 남도석성에서 고려와 몽고연합군을 맞서 치열하게 저항했다.

그때,배중손은 전사해서 남은 삼별초는 다시 항파두리성과 싸웠다.김통정은 저항햇으나,지고 말았다.

 

 

 

 

왕온의묘

몽고군은 일본을 정벌하고자 새로 개발한 화포를 삼별초군과 싸울 때 사용했는데 진도에서 10일 동안 벌어진 전투로 삼별초군은 위기에 몰리게 되며, 그들이 궁궐로 사용하던 용장사 큰 가람은 완전히 불타버렸다. 패주하던 왕온(王溫)은 너무나 다급한 나머지 왕무덤재를 올라 갈 때 말을 거꾸로 탄 채 말꼬리를 붙잡고 달렸다는 얘기가 있다. 어쩌면 낙마하여 꼬리를 붙잡고 달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왕무덤에서 붙잡힌 왕온과 그의 아들 항의 목을 치자는 주장과 목숨을 살려 데려가자는 주장이 맞섰지만 결국 이들 부자(父子)는 적장의 칼에 목을 허락할 수 밖에 없었다.
고려의 자주(自主)를 위해 항거하던 삼별초 정신과 몽고의 속국이 되어 자주항거집단을 토벌하러 나선 고려 개경 정부의 조카들이 진도의 이름없는 어느 산골짜기에서 몽골 장수의 고집을 꺽지 못하고 만다.
외세의 압력에 따라 조카가 백부를 죽이고 사촌 형제의 목을 치는 고려 왕실의 비극이 논수곡(論首谷)과 논수동(論首洞)이라는 이름을 남겨놓았다.
왕무덤재는 물론 왕온의 무덤이 바로 옆에 자리한 이유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고, 바로 밑에 왕이 탔던 말의 무덤이 남아 있으나 아들 항의 무덤은 남아있지 않다. 패주하던 삼별초가 돈지에서 둘로 나뉘어 김통정(金通精)은 금갑 방면으로, 배중손(裵仲孫)은 임회 방면으로 도망쳤다. 금갑에서 배를 탄 김통정, 유존섭은 제주까지 건너가 그곳에서 2년 남짓 항몽전을 펴다가 섬멸되었다.

 

 

 

 

진도 남도진성 (珍島 南桃鎭城) 사적 제127호

고려 원종(재위 1259∼1274), 삼별초가 진도에서 몽골과 항쟁을 벌일 때 해안지방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으로, 삼별초가 제주도로 옮겨갈 때 이곳에서 출발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백제 때 진도에는 3개의 마을이 있었고 그 중 한 마을의 중심지가 이곳으로 여겨지는데,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이어져 오는 것을 보면, 삼국시대에 이미 성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13세기부터는 왜구가 나타나서 노략질을 계속해 오자, 고려 충정왕 2년(1350)에 진도의 관청과 백성들이 내륙지방으로 피해서 살다가 세종대왕 초에 돌아오기도 했다. 결국 세종 20년(1438) 해안지방에 주로 설치되던 군사조직인 만호부가 이 지역에 생기게 되고 왜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성을 쌓았는데, 지금 남아있는 성은 그 이후에 쌓은 것으로 여겨진다.
동·서·남문이 있던 자리가 잘 남아 있으며, 둘레가 400여m 정도이지만, 해안지방을 보호하기 위한 중요한 위치임을 보여주고 있는 유적으로 가치가 매우 크다.

 

 

 

 

 

철마산에는 산성터가 있는데 옛날 『옥주지』천조에 의하면 “진도의 주산으로서 진도의 북쪽 2리 지점에 있는데 옛날 뇌산현(군) 때 산성을 쌓아서 관방처로 삼았다.”고 밝히고 있다. 이곳은 지형이 북쪽으로 약간 돌출되어 있으며 하단으로는 암벽이 곧추서 있다. 여기에서는 신안군의 여러 섬들뿐만이 아니라 진도군해남군의 북쪽 해안지역이 잘 조망된다.
북산에 마조단을 설치하여 철마신상을 모시고 있는 곳에 유래한 철마산은 현 지형도 상에 북산에서 서쪽으로 1㎞ 정도에 떨어진 304m 봉을 말하고 있다. 현재 과거 진도읍 장터를 철마광장이라고 하며 이곳이 진도의 중심광장이다.

 

 



 

 

 

삼별초는 좌별초, 우별초, 노기병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별초군은 원래 고려의 특수전사 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려가 몽고에 강화를 맺은 것을 반대하여 총 세 개의 신군을 통합하여 '삼별초'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 중, 노기군은 원나라에 노비로 끌려갔다가 탈출하거나 풀려난 사람들로 이루어진 군대였습니다.

삼별초는 진도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1271년 5월).  삼별초는 7,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진도로 진출하였습니다.  고몽 연합군은 삼별초와 대적하기 위해 전라도까지 갔습니다.  몽고군은 해전에 약하여 고려군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진도로 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고려군은 진도에서 미리 준비하고 있던 삼별초군에게 패하고 맙니다.  그러나, 2차 전투에서 군사의 반 이상을 잃은 삼별초군은 대패한 채로 진도에서 철수하였습니다. 

배중손은 제주도로, 중종민은 거제도로(1271년 7월)...  진도에서 철수한 삼별초군은 제주도와 거제도로 향하게 됩니다.  배중손의 우별초는 제주도로, 중종민의 좌별초는 거제도로 갔습니다.  그러나, 중종민의 선택은 잘못되었습니다.  고려가 가치관을 금주에 설치하였었기 때문입니다.  중종민의 좌별초는 곧 파괴됩니다.  배중손도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지만, 군사의 수가 3,000 대 4만 8, 000이었습니다.  한 명이 16명과 대적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발달된 몽고의 무기 때문에 우별초는 패하면서 삼별초가 무너졌다고 합니다. 


 

 

 

 

 

 

진도망금산관방성 (珍島望金山관방城)

망금산성은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에 있는 망금산(높이 111.5m) 정상에서 동남쪽 500m 밑의 허리에 있는 작은 봉우리(67m)에 있는 성이다.

성의 둘레는 460m이며, 서쪽이 동쪽보다 높은 서고동저형(西高東低型)의 테뫼식 해협 관방성으로 도랑을 판 흙과 막돌을 섞어 쌓고 외벽을 깎아 접근이 어렵도록 되어 있다.
망금산 관방성은 명량대첩의 역사현장이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곳은 당시 전쟁에 이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관방 유적이며, 성안에서 백제 와당이나 신라 토기를 수습한 점, 그리고 많은 성 가운데에서도 물목을 지키는 관방성이라는 점에서 지리적으로 중요하여 보존하고 보호할 가치가 크다. 조선시대 임진·정유란 때 강강술래를 했던 곳이라 전하고 있으나, 경사를 이루고 있는 지형여건 등에서 보면 고증하기가 어렵다. 이 성은 그보다 훨씬 전에 축성하여 관방유적으로 기능했기 때문에 관방성으로서의 지리적 중요성이 있다.
충무공 이순신이 진도를 남도(南道)의 요충(要衝)이라 하였고 조선 선조 때 판중추부사 유두수가 진도를 ‘가장 중요한 관방지역(最爲緊關之地)’이라 한 점, 『동국여지지』에 ‘해로요해지지(海路要害之地)’라 한 것은 울두목(咽喉之地)을 이른 것이다. 망금산성은 이 울두목을 지키기 위한 관방성으로 통일신라시대 축성 이후 고려∼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관방유적으로 기능을 하여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다.

 

 

 

 

 

명량해전

정유재란 때인 1597년(선조 30) 9월 16일 이순신(李舜臣)이

 명량(울돌목 : 전라남도 진도와 육지 사이의 해협)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한 해전.

 

 

 

 

이순신의 명량대첩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에 세운 비.
정유재란 당시 이충무공에 의해 가장 통쾌한 승리를 불가사의하게 거둔 명량해전 승첩을 기념하고

진도 출신 참전 순절자들을 기록하기 위해 1956년 11월 29일 건립되었다

 

 

 

 

조선시대의 무기

 

 

 

 

 

 

 

유배문화

위리안치(圍籬安置)는 유배형 중의 하나이다.

귀양간 곳의 집 둘레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돌리고 그 안에 사람을 가둔다.

 죄가 무거운 사람에게 적용되었다. 탱자나무는 전라남도에 많으며, 대개 전라도 지역의 섬에 유배되었다.

 

 

 

 

진도의 바닷길 (珍島의 바닷길) 명승 제9호

일명 ‘신비의 바닷길’로 불리는데, 조수간만의 차로 바닷물이 빠져나가면서 마치 바다가 갈라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바닷길은 길이가 2.8㎞, 폭 10∼40m이며 지형적 요인과 함께 달과 태양의 위치가 1년중 지구에 가장 강한 인력을 미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해류의 영향으로 바다 밑의 모래층이 발달해 바닷물이 빠질 때는 큰 차가 다닐만큼 단단하다. 약 1시간동안 계속되는 이 바다갈림 현상은 1975년 주한 프랑스 대사인 피에르 랑디가 진도개의 상태를 보러 왔다가 이를 보고 ‘한국판 모세의 기적’이라고 프랑스 신문에 소개한 뒤 세계적인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진도 주민들은 바닷길이 가장 크게 열리는 봄(2∼4월)과 가을(9∼10월)에 마을의 수호신인 뽕할머니와 용왕에게 어업과 농사의 풍년을 비는 영등제를 함께 지낸다.
우리나라에서 바다갈림 현상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충남 보령 무창포를 비롯해 전국에 약 20여 곳이 있는데, 그 중 진도의 바닷길이 규모가 가장 크다.

 

 

 

 

진돗개

진돗개 (珍島- )는 품종 중 하나로, 한국의 대표적인 사냥개이다. 용맹하고 충성심이 강해 주인을 잘 따른다.

털은 주로 노란 것(황구,黄狗)과 흰 것(백구,白狗)이 있으며, 그 외 네눈박이, 호구 검정(흑구,黑狗) 등 10여 종류의 다양한 것이 있다. 귀가 쫑긋 서 있고 꼬리는 위로 말려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1962년 진도 특산인 진돗개를 천연기념물 제 53호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1967년에는 〈한국진돗개보존육성법〉이 제정되어 혈통이 보존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2005년 케널 클럽(KC)과 세계애견연맹(FCI)에 정식 품종으로 등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