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여행] 42명의 대과급제자를 배출한 윤씨 문중의 종학당

2012. 6. 21. 06:00전국 문화재와 박물관/국가지정 문화재

 

 

 

 

[논산여행] 42명의 대과급제자를 배출한 윤씨 문중의 종학당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52호

 

 

충남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에 위치한 종학당은 파평 윤씨 문중의 자녀와 내외척, 처가의 자녀들이 모여 합숙교육을 받던 교육도장이다. 인조 21년(1643) 윤순거가 문중의 자녀교육을 위해 세운 후 종약(宗約)을 제정하였다. 화재로 인해 없어졌다가 1970년 윤정규가 지금의 종학당을 다시 지었다.

앞면 4칸·옆면 2칸으로 가운데 2x2칸은 대청을 겸한 트인 마루를 두었고 양쪽 칸은 방을 설치하였다.

1910년까지 운영된 종학당은 일반 서원이나 서당과는 다르게 교육목표와 교육과정을 두고 학칙도 정하여 시행하였다.

※(1999년 ~ 2003년) 4년여에 걸쳐 원형을 복원하고 주변정비를 하였다.
종학당은 조선 인조 21년(1643) 윤순거가 문중의 자녀교육을 위해 건립하고 종약(宗約)을 제정하여 종중의 자녀와 문중의 내외척, 처가의 자녀들이 모여 합숙교육을 받던 교육도장(敎育道場)이었다.

그러나 화재로 인하여 학사건물이 소실되었다가 1970년에 이르러 동토 선생의 5대손인 정규(果川公)가 현재의 종학당을 다시 재건축하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써 중앙 1칸은 대청을 겸한 통간(通間)마루를 설치하였고, 양쪽 1칸은 방을 설치한 한옥 8작(八作)건물이다.

이 종학당에서는 일반서원(書院)이나 서당과는 다르게 교육목표를 정하고 교육과정을 두고, 학칙도 정하여 시행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전까지 운영되다가 합방이후 신교육제도의 도입으로 폐쇄되었다.

 

 

 

 

 

 

충청남도 논산노성 지역 파평윤씨 가문은 충청도를 대표하는 양반 가문이다. 노성은 이들 파평윤씨 노종 5방파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배출된 유서와 전통이 살아 있는 곳으로, 특히 이곳에 집중되어 분포한 종학당과 병사, 선영과 영당, 서원과 정려, 종가 고택 등은 조선시대 호서 지역 양반들의 유교 문화를 빠짐없이 접할 수 있는 문화 자원이다. 특히 후학들이 정신문화와 유교적 사회 이념을 실천했던 역사가 쟁쟁한 곳이다.

 

 

 

 

 

파평윤씨의 논산 정착 과정

 

파평윤씨충청남도 논산 지역 노성에 자리 잡게 된 것은 승지공(承旨公) 윤돈(尹暾, 1519~1577)이 1540년경 처가가 있는 곳으로 이거하면서부터였다. 노성으로 이거한 이후 불과 100여 년 남짓의 기간에 연산광산김씨, 회덕은진송씨와 더불어 호서삼대족(湖西三大族)의 하나로 지목될 만큼 빠른 성장을 하였다. 주로 니산(노성)을 생활 근거지로 삼고 있던 파평윤씨 노종 5방파는 거주지가 니산에만 밀집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송시열『회덕향안』 서문(1672)에서 “내가 생각건대 호서에는 예로부터 3대족이라 일컫는 바가 있었으니 연산김씨, 니산윤씨,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회덕송씨이다.”라고 하여 니산(노성)의 파평윤씨호서 지방의 대표적인 사족으로 지목하고 있다.

노성에 처음 자리 잡은 윤돈윤선지(尹先智)평산신씨 사이에서 3형제 중 둘 때 아들로 태어났다. 윤돈의 형 윤의(尹曦)와 아우 윤욱(尹昱)경기도 파주에 살았고, 윤돈만이 통정대부 유연(柳淵)의 2녀 문화유씨와 결혼하면서 1538년경 처향(妻鄕)인 노성 근방의 니산현(尼山縣) 득윤면(得尹面) 당후촌(塘後村: 지금의 광석면 득윤리)로 이주하면서 노성 지역과 인연을 맺었다. 윤돈이 이곳에서 처가의 가통을 유지·존속시키는 역할을 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결혼 직후인 1540~1550년대 어간에 노성에 정착하였다고 생각된다.

당시 사정을 자세히 전해주는 정확한 기록은 거의 없지만 윤돈이 처가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은 화회 문서(和會文書, 分財記)가 전해지고 있어 주목된다. 이 화회 문서는 장인이었던 유연의 삼년상을 마친 1573년 8월 12일에 자녀들이 모여 처가 재산을 나눈 문서이다. 윤돈은 59세의 일기로 죽었고 그의 아들 윤창세(尹昌世, 1543~1593)광석면 득윤리에서 지금의 노성면 병사(丙舍) 비봉산(飛鳳山) 자락으로 터전을 옮겼다. 그가 병사리에 터를 잡게 된 까닭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이곳에서 생업에 종사하면서 서모(庶母)와 아들이 없는 장모까지 한 집에 모셨다는 것을 미루어 보면 이곳이 처가의 전장(田莊)이 있던 곳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

윤창세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독자였던 외숙이 후손 없이 죽자 홀로된 외숙모를 부모 모시듯 정성껏 모셨다. 뒤에는 문화유씨가의 봉제사를 아들 윤희(尹熺)가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런가 하면 처가인 청주경씨(淸州慶氏) 가문의 유산 일부도 상속받음으로써 노성 병사리로의 이거가 가능했던 것 같다. 바로 윤돈-윤창세의 가계를 이어 노성 5방파가 파생되었는데 윤창세의 아들들인 설봉공(윤수), 문정공(윤황), 충헌공(윤전), 서윤공(윤흡), 전부공(윤희)의 5방파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 5방파의 형성시기인 16~17세기 전기는 호란과 청조의 압력으로 국가가 흔들리는 혼란기로서 노종 5방파 인물들은 척화운동을 주도한 척화가문으로서도 명성을 날렸다. 이를테면 팔송(八松) 윤황(尹煌)은 척화상소 문제 때문에 유배생활을 하였고, 윤황의 아우 윤전(尹烇)강화에서 청군과 대치 중 순절하였으며, 윤선거(尹宣擧)의 처 공주이씨강화에서 역시 자진(自盡) 순절하는 등 사족 가문으로 이름을 날렸다.

물론 이들 파평윤씨 노종 5방파의 세거 연고지는 노성에만 한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들의 거주지를 정리해보면 최초 노성에 자리 잡은 윤돈광석면 득윤리에, 윤창세광석서울, 윤황노성 병사리에, 윤황의 아우인 윤전당후촌에 거주하였고, 윤황의 아들 윤문거(尹文擧)석성에, 윤선거금산에, 윤증(尹拯)노성에 각각 거주하였다. 그런데 이들 소위 5방파 중에서도 윤황의 직계가 가장 번성하였다.

윤황의 슬하에 성장한 8형제 모두가 걸출한 인물들이었는데, 이들은 윤훈거, 윤순거, 윤상거, 윤문거, 윤선거, 윤민거, 윤경거, 윤시거이다. 이들 중 윤문거김집(金集)의 제자로 문과 급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부제학·대사헌·이조참판 등 여러 관직을 제수받았다. 그러나 대부분 사직함으로써 명예에 초연한 자세를 견지한 인물이었다.

 

 

 

 

 

파평윤씨가의 문중서당 종학당

 

종학당노성면 병사리에 위치하고 있는 파평윤씨가의 문중서당이다. 종학당파평윤씨 종중의 자녀와 문중의 내외척, 처가의 자녀들까지 합숙·교육시키기 위해 건립되었다. 최근 숭정 원년의 상량문이 발견되어, 1628년경에 윤순거가 건립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16세기 중반에 니산(노성)에 터를 잡은 파평윤씨 일가가 빠른 시일 내에 조선의 명문가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바로 종학당의 문중 교육에 힘입은 바 컸다고 할 수 있다.

종학당의 역사는 1624년 인평대군의 사부였던 윤순거가 병사 재실에서 종학의 기틀을 마련한 데서 비롯되었다. 1628년 어간에는 현재의 위치에 백록당(白鹿堂)정수루(淨水樓), 그리고 승방인 정수암(淨水庵) 등 세 채의 건물을 지어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종학에는 각종의 책자, 기물 등이 구비되었고 윤순거가 초대 당장으로 진력하였다. 이곳은 과거 준비는 물론 강학과 학문토론의 장소로 이용되었고, 특히 교육은 일반 서원이나 서당과 달리 파평윤씨 종학(宗學)의 규칙과 규율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종학당의 교육이념과 체계는 1645년에 만들어진 파평윤씨 노종파 종약(宗約)과 윤증이 1680년과 1701년에 각각 만들어 현재 종학당에 걸려 있는 「초학화일지도(初學畵一之圖)」「위학지방도(爲學之方圖)」를 통하여 상세히 엿볼 수 있다. 종학의 전통은 윤증 때 이르러 더욱 활발하게 운영되었는데, 당시까지는 주로 병사와 정수암이 주요 거접처로 활용되었고 독립된 서당으로서의 건물을 갖춘 것은 유봉 영당에 건립된 1817년의 종학당이 단초가 된다.

이후 현재의 위치로 이건, 규모를 일신하게 된 것은 1829년 과천공 윤정규 등에 의해서였다. 이때 반호(盤湖) 윤광안(尹光顏)종학당 재건의 건축 자재와 400여 권의 서책, 그리고 200석의 전답을 출연하였고, 이를 계기로 1829년 그의 4종질 과천공(果川公) 윤정규(尹正圭)가 4칸 전후퇴의 건물을 마련함으로써 현재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 뒤 1853년과 1893년 두 차례에 걸쳐 중수하였으며, 1915년 대화재로 백록당정수루 일부가 불에 탔다.

종학당은 1987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93호로 지정되었다가, 1997년 원래의 유서대로 종학당백록당 정수루를 하나로 합하여 유형문화재 제152호로 재지정되었다. 국비와 도비 및 시비의 지원을 받아 1999년에는 종학당, 2000년에는 정수루를 각각 원형 복원하였고, 이를 계기로 2001년 강당인 보인당과 함께 이 일원을 종학원(宗學園)으로 통칭하고 있다. 이러한 종학당의 유서와 전통은 그 자체로서도 의미가 매우 크다. 여기에 더하여 종학당 일원은 노성윤증 고택과 함께 호서사림의 문화와 정신사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곳이고, 유교문화 및 전통 교육의 문화유산들이 집중되어 남아 있는 곳이다.

 

 

 

 

 

 

 

 

 

 

 

 

 

 

 

 

 

 

 

 

 

 

 

 

 

 

 

 

 

 

 

 

 

 

 

 

 

 

 

 

 

 

 

 

 

 

 

 

 

 

 

 

파평윤씨 관련 유적

문중 서당인 종학당을 중심으로 불과 5~6㎞의 반경 속에 정수루, 유봉 영당, 병사리파평윤씨 종파 대종중 재실과 선영, 윤증 고택 및 윤증가와 유품, 노성향교궐리사, 오강서원, 공산이씨 정려, 문중규약인 종약 책과 각종 문서 자료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전국 어느 곳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유적과 유물들이 모여 있다. 나아가 인근에 파평윤씨 가문의 수많은 인물들과 이들의 전통을 문화로 간직한 동족마을들도 수없이 많다. 이곳 유적들은 조선시대 호서 지역 양반 유교문화를 빠짐없이 접할 수 있는 대표적인 문화자원이다.

1. 병사리 선영과 병사

노성면 병사리 범바위산 기슭에 종학당정수암이 위치하고 있으며, 바로 맞은편 산 중턱쯤에 노성윤씨 가문의 대종중 재실인 ‘병사(丙舍)’와 묘소, 신도비 등이 위치하고 있다. 노성면 병사리 파평윤씨 묘역에는 입향조인 윤돈과 그의 아들 윤창세, 손자 윤수윤전, 증손자인 윤순거와 그 아들 윤진의 묘소와 신도비가 있다. 그리고 파평윤씨 입향 당시의 사실과 인척 관계를 알려주는 유연의 묘소가 좌측에 있다. 묘역의 하단에는 1630년대에 건축되었다는 병사와 강당(講堂), 최근에 중건한 덕포공 재실이 위치한다.

2. 윤황 고택과 묘소

논산시 노성면 장구리에 위치한 파평윤씨의 종중인 팔송 윤황 고택은 충청남도 민속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다.

3. 노강서원

논산시 광석면 오강리에 위치한 서원으로 1675년(숙종 1)에 창건하였으며, 1682년(숙종 8)에 사액을 받았다. 노강서원은 충청남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윤황을 주향으로 하고 윤문거·윤선거·윤증 3인을 추향하였다.

4. 윤증 고택과 유품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에 위치한 윤증 고택은 1984년 12월 26일 중요민속자료 제190호로 지정되어 있다. 윤증가의 유품은 1970년 12월 29일 중요민속자료 제22호로 지정되었다. 이들 유품들은 모두 11점으로, 노성면 교촌리 306번지 윤증 고택유봉 영당에 보관되어 있다.

5. 명재 영당경승재

유봉(酉峰) 영당이라고도 불리는 명재(明齋) 영당경승재는 현재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 182번지에 위치한다. 약 1,500여 평의 대지 위에 영당과 경승재로 구성되어 있다. 영당은 명재 윤증 사후에 인근 유림들이 건립한 건축물로 1744년(영조 20) 창건되었으며, 명재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쇠락해 있던 것을 후손에 의해 현재의 모습으로 중수·보존되고 있다. 1985년 12월 31일 충청남도 지정 문화재자료 제280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