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6. 17. 16:00ㆍ전국 문화재와 박물관/국가지정 문화재
[논산/강경여행] 황산서원과 황산정이라 불리던 죽림서원과 임리정
죽림서원 (竹林書院)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5호
충남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에 위치한 죽림서원은 율곡 이이·우계 성혼·사계 김장생·정암 조광조·퇴계 이황·우암 송시열 등의 선현에게 제사를 지내고 후학을 교육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이이(1536∼1584)는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인 신사임당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아홉 번의 과거에 모두 장원급제하였다. 그는 이황과 더불어 조선 성리학을 대표하는 학자로, 원리를 중시한 이황에 맞대어 경험을 중시했다.
성혼(1535∼1598)은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젊어서부터 이이와 학문을 교류하였으며 많은 벼슬자리에 추대되었으나 거절하다가 이이의 권유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이 서원은 이이와 성혼을 기리기 위해 인조 4년(1626)에 황산서원이라 하여 세웠다. 후에 김장생을 추가하였으며 현종 6년(1665)에 임금으로부터 ‘죽림’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고 조광조·이황·송시열의 위패를 추가했다.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 1946년에 제단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오다가 1965년 사우를 다시 세웠다.
서원의 건물은 출입구인 홍살문과 외삼문을 통하면 동재, 서재, 내삼문, 사우가 있다.
사우의 오른쪽에는 죽림서원의 중건비와 황산서원의 지비를 세워 놓았다. 사우는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문묘에 모시고 있는 선현들만 모신 서원으로, 음력 3월 15일과 9월 15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임리정 (臨履亭)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7호
충남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 죽림서원 윗쪽 야산에 위치한 임리정은 조선 인조 4년(1626) 사계 김장생(1548∼1631)이 지은 정자로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원래의 이름은 황산정이었으나 “깊은 못가에 서 있는 것과 같이, 얇은 얼음장을 밟는 것과 같이, 자기의 처신과 행동에 항상 신중을 기하라”라는 『시경』의 구절을 따서 임리정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앞면 3칸의 기둥 사이를 같은 간격으로 나누어 왼쪽 2칸은 마루를 깔아 대청으로 하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을 두었다. 뒤쪽으로는 사랑방을 2개 꾸며 사람들을 맞이할 수 있게 하였다.
임리정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정자 양식을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이 정자는 조선(朝鮮) 인조(仁祖) 4년(1626) 유학자(儒學者)이며 예학(禮學)의 태두(泰斗)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1548∼1631) 선생이 건립한 강학(講學) 장소다. 임리정이란 사서삼경(四書三經)의 하나인 시경(詩經)의 "여림심연(如臨深淵) 여리박빙(如履薄氷)"의 구절에서 유래한 것이다. 즉 깊은 못가에 서 있는 것과 같이 또한 얇은 얼음장을 밟는 것과 같이 항상 자기의 처신과 행동에 신중을 기하라는 뜻이다. 원명은 황산정(黃山亭)이었다고 전하며 조선(朝鮮) 중기(中期)의 대표적인 정우(亭宇) 양식(樣式)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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