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산 길상사와 시인 백석의 연인 자야(김영한)의 사랑이야기

2012. 11. 27. 05:57전국 절집이야기/사찰(寺刹) 이야기

 

 

 

 

삼각산 길상사와 시인 백석의 연인 자야(김영한)의 사랑이야기

 

 

 

 

겨울초입에 성북동에 위치한 길상사(吉祥寺)를 둘러 봅니다

서울 도심에 위치해 가끔 찾는 곳이지만 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절은 본래는 '대원각' 이라는 이름의 고급 요정이었으나 요정의 주인이었던

고 김영한(1916 ~1999, 법명 길상화)이 건물을 시주하여 사찰로 탈바꿈하게 되었고

1995년 6월 13일 법정 스님에 의하여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말사인

 '대법사'로 등록되었으며 주지로 현문 스님이 취임하였습니다.

1997년에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어 재 등록되었고

 같은 해 2월 14일에 초대 주지로 청학 스님이 취임하였다.

경내에는 극락전, 지장전, 설법전 등의 전각이 있으며

 행지실, 청향당, 길상헌 등의 요사가 존재한다.

2010년 법정 스님이 길상사에서 78세 (법랍 54세) 로 입적하였다.

길상사의 원전인 대원각을 시주한 고 김영한은 근대시인 백석

연인으로 알려진 '자야' 와 동일 인물로 길상사 시주와 더불어 

이들의 애절했던 사랑도 빠지지 않고 이야기 되고있다.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 김영한(법명 길상화)

 

영화속에서나 나올법한 사랑이야기입니다. 죽을때까지 한 사람만을 사랑한 여인 

시인 백석의 연인인 김영한, 백석이 자야라고 불렀던 그녀는 기생이였다.

부유한 가정에 태어 났으나 급격히 가세가 기울어 15살의 나이에 병약한

남성에게 팔려 시집을 갔고 남편이 우물에 빠져죽어 기루에 팔려 기생이 되었다.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길은 아니지만 영민한 그녀는 가무에 능한 조선 제일의

기녀가 된다. 그 당시 유명했던 잡지에 수필을 발표할 정도로 다재다능 했다.

그리고 그녀는 눈을 감을때까지 사랑한 남자 시인 백석을 만난다.

 

 

 

 

 

 

 

 

 

김영한이 사랑한 남자 시인 백석은 영문학을 전공했고 함흥여고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그가 김영한을 만나고 있다는게 알려지자 그를 미련없이 학교를 그만두고 김영한을 만난다.

그러나 그는 김영한과의 만남을 반대하는 부모님 때문에 세번의 결혼을 했고

김영한을 사랑하기에 만주로 함께 도피하고자 했지만 백석의 걸림길이 될까 거절하자

백석은 혼자 만주로 떠난다. 하지만 어찌 알았으랴!  해방과 전쟁을 겪으면서 남북으로

서로 갈라져 살게 될줄을 하지만 백석의 대한 김영한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백석의 생일이 되면 음식을 먹지않고 그를위해 기도했으며 그를 이해하기 위해

영문학을 전공 했으며 백석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담은 책을 출간했다.

또한 그를 생각하는 마음에 1999년 창작과비평사에 2억원의 기금으로 백석 문학상을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는 법정 스님에게 1996년 누구나 와서 마음의 평안을

찾는 곳이 되기 바란다며 대원각을 시주한다. 7천여평의 대지에 40여동의 건물이 있는

대원각은 당시 시세 1,000억이 넘는 재산이었다.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어 들은 대답은

"후회는 무슨 후회! 천억도 그 사람 시 한줄만 못해"였다. 그리고 김영한은

끝내 백석을 만나지 못한채 첫눈 오는날 자신의 유해를 길상사 마당에 뿌려달라고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는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그들의 사랑을 기억해 낸다.

 

 

 

 

 

 

 

 

백석


백석의 본명은 백기행白夔行이다.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1929년에 오산중학을 졸업하고, 일본 아오야마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다가

1934년 귀국해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이후 함흥 영생여고보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으며,

 1939년에는 만주의 신경(지금의 장춘)으로 떠나 유랑생활을 했다. 1935년 8월 《조선일보》에

 「정주성」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했다.

 이후 1941년까지 《조선일보》 관련 지면을 중심으로 꾸준히 시를 발표했으며, 광복 후에는

《신천지》와 《학풍》에 「 적막강산」(1947),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1948) 등을 발표했다.

해방 후 고향 정주에 머물렀으며 1959년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에 있는 국영협동조합으로 내려가

양치기 일을 하다가 1995년 1월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석은 그를 주제로 한 석·박사 논문만

 총 600여 편에 이를 정도로 '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자 대중의 사랑도 한 몸에 받고 있는 시인이다.

 그의 시는 모더니즘과 근대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인식을 토대로 하며, 시작법상 의식적으로 평안북도

 방언을 사용해 토속적인 풍물과 풍속을 그려내 현대 시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더불어 아름답고 서정적인 운율로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귀에는

 우리네 정서와 습속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묘한 그리움을 느끼게 한다.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김영한이 주인공이라 알려져 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속에 고조곤히 조용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삼각산 길상사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323

02-3672-5945

www.kilsangs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