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이 세운 조선후기 대표적인 이궁(離宮) 경희궁지(사적 제271호)

2012. 11. 30. 11:55전국 문화재와 박물관/국가지정 문화재

 

 

 

 

 

광해군이 세운 조선후기 대표적인 이궁(離宮) 경희궁지(사적 제271호)

 

 

 

경희궁은 원종의 집터에 세워진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이궁(離宮)이다.

원종(1580∼1619)은 선조의 5째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로 후에 왕으로 추존되었다.

광해군 8년(1616)에 세워진 경희궁은 원래 경덕궁 이었으나

영조 36년(1760)에 이름이 바뀌었다.

원래의 규모는 약 7만여평 이었다. 그러나 민족항일기인 1907년부터 1910년에 걸쳐

 강제로 철거되어 궁궐로서의 존재가치를 상실하였고 궁터도 철저하게 파괴되고 변형되어

결국 현재의 규모로 축소되었다. 경희궁에는 부속건물로 회상전, 융복전, 집경당, 흥정당, 숭정전,

 흥학문, 황학정이 있었는데 융복전과 집경당은 없어졌다. 나머지 건물은

1910년 서울고등학교가 설립되면서, 회상전은 조계사로, 흥정당은 광운사로,

숭정전은 조계사에 옮겼다가 다시 동국대학교 안으로, 흥화문은 박문사로,

황학정은 사직공원 뒤로 각각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현재 이 자리에 궁궐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물로는 정전이었던 숭정전의 기단부와 제자리에서 옮겨진 석수, 댓돌 등이 있고

 이 밖에 바위에 새진 글이 남아있다. 공터 북쪽에 돌로 쌓은 축대의 길이는

 약 100m로 건물로 오르는 계단에는 용머리조각과 구름무늬가 있어 주목된다.

 

 

 

 

 

 

 

 

경희궁(慶熙宮)은 원래 인조(仁祖)의 생부(生父)인 원종(元宗)의 사저(私邸)인 새문동(塞門洞)집터가 있던 곳으로

이곳이 왕기(王氣)가 서린다는 풍수설(風水說)의 제안(提案)을 듣고 광해군(光海君)이 그의 9년(年)(1617)에

궁궐(宮闕)을 건립(建立)하기 시작하여 경덕궁(慶德宮)이라 불렀다. 그러나 광해군(光海君)은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의하여

궁(宮)의 완성(完成)을 보지 못하고 1623년에 폐위되고 말았다. 그후 인조(仁祖)는 인목대비(仁穆大妃)를 받들어 일시 이곳에

머문 일이 있고 그 후에도 역대왕(歷代王)들이 이 궁(宮)에 거처(居處)하여 왕궁(王宮)의 면모(面貌)를 갖추게 되었다.

한편 영조(英祖) 36년(年)(1760)에는 경덕(慶德)의 궁명(宮名)이 원종(元宗)의 시호(諡號)인 경덕(敬德)과 같은 음(音)이라 하여

 경희궁(慶熙宮)으로 이름을 고쳤다. 그러나 궁명(宮名)은 이외(外)에도 여러 가지로 불리웠는데 북궐(北闕(경복궁(景福宮))과

 東闕(창덕궁(昌德宮), 창경궁(昌慶宮))이란 궁명(宮名)에 대응(對應)하여 서궐(西闕)이라고도 하였으며 별명(別名)으로는

 새문안대궐(新門內大闕)또는 새문동대궐(塞門洞大闕), 야주재대궐(夜珠峴大闕)이라고도 하였다.

 

 

 

 

 

 

 

 

경희궁(慶熙宮)에는 외조(外朝)인 흥화문(興化門)을 비롯한 승정문(承政門) 등

 출입공간(出入空間)과 치조(治朝)인 숭정전(崇政殿), 자정전 구역(資政殿 區域),

또 연조(燕朝)인 융복전(隆福殿), 장락전구역(長樂殿區域) 등이 배치(配置)되어 있다.

이 외(外)에도 회상전(會祥殿), 집경전(集慶殿), 만학정(萬鶴亭) 등 100여동(餘棟)의 대소(大小)

 건물(建物)들이 있었음을 궁궐지(宮闕志)나 서궐도안(西闕圖案)등의 자료(資料)로서 알 수 있다.

 

 

 

 

 

 

 

순조(純祖) 29년(年)(1829) 10월(月) 이 궁(宮)은 화재(火災)로 인하여 건물(建物)의

 대부분(大部分)이 소실(燒失)되었으나 1831년에 다시 중건(重建)되었다. 그러나 1910년 일제시대(日帝時代)에

들어서 이 궁(宮)의 건물(建物)들은 헐리고 이곳에 경성중학교(京城中學校)가 세워졌다. 이때 남아있던 숭정전(崇政殿)을

 비롯한 몇동(棟)의 건물(建物)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즉 숭정전(崇政殿)은 남산(南山) 기슭에 옮겨져

조계사(曹溪寺)의 본전(本殿)으로 사용되어 현(現) 동국대학교내(東國大學校內) 정각원(正覺院)으로

 현판을 걸고, 흥정당(興政堂)은 광운사(光雲寺)로 이건(移建)되었으며 황학정(黃鶴亭)은 현(現) 사직단(社稷壇) 뒤로

이건(移建)되고 또 흥화문(興化門)은 1932년 박문사(博文寺) 북문(北門)으로 이치(移置)되었다가

신라(新羅)호텔 정문(正門)으로 사용되었는데 1988년 경희궁 가까운 현재 자리로 이전되었으나 원래의 자리는 아니다.

 

 

 

 

 

 

이 궁지(宮址)는 광복후(光復後)에도 계속 서울중고등학교(中高等學校)로 사용되다가

그 후 현대(現代) 건설(建設)에 매각(賣却)되었다가 다시 서울(市)에서 관리(管理)를 하게 되어

 그 복원정비(復元整備)를 위하여 1985년과 1987년 두 차례에 걸쳐 숭정전지(崇政殿址)를

중심(中心)으로 발굴조사(發掘調査) 하였다. 그 결과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와 계단(階段)을

 비롯한 어도(御道)의 적심석(積心石), 그리고 좌우(左右) 행각지(行閣址) 숭정문지(崇政門址) 등

 유구(遺構)가 밝혀졌다. 한편 서울시(市)에서는 1988년 흥화문(興化門)의 복원과

 1990년 숭정전(崇政殿)의 복원(復元) 등 경희궁지(慶熙宮址)의 정비(整備)와

 그 복원계획(復元計劃)을 갖고 계속사업(繼續事業)으로 시행하고 있으며

현재도 시민(市民)의 교육장(敎育場) 또는 공원(公園)으로 개방(開放)되고 있다.

 

 

 

 

 

 

 

숭정전(崇政殿)은 이중월대(二重月臺) 위에 세운 정면(正面) 5칸(間),

측면(側面) 4칸(間)의 팔작지붕을 한 건물인데 기둥의 배열(配列)은 전·후 (前·後) 내외진(內外陣)으로 하였으며

후측(後側) 중앙(中央)에는 어좌(御座)를 꾸미었다. 건물의 4면(面)은 꽃살문의 분합(分閤)을 달았고

그 위에는 교창(交窓)을 내었다. 공포의 외부(外部)로는 창방(昌枋)위에 외2출목(外2出目)의 쇠서와

교두형(翹頭形) 첨차를 두어 다포계(多包系)의 특징을 보이고 있지만 공간포(空間包) 대신 화반(花盤)을 두고

공포 내부(內部)에는 출목(出目)없이 양봉형(養奉形)으로 보아지를 마련하여 보를 받치고 있음도

다른 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내부반자는 우물반자를 꾸미어 화려(華麗)한

용(龍)무늬 단청(丹靑)을 그렸다. 건물 앞에 놓인 계단(階段) 역시 다른 궁(宮)의 정전(正殿)의

 예(例)와 같이 삼도(三道)로 꾸미어 중앙(中央)에는 쌍학(雙鶴)을 양각(陽刻)하여 조각(彫刻)으로 장식했다.

또 흥화문(興化門)은 궁지(宮址)의 동남(東南)쪽 금천교 밖으로 놓여 있었는데 정면(正面)이

3칸(間)이고 측면이 2칸(間)인 다포계(多包系)의 공포를 보이는 웅장한 건물이다.

 

 

 

 

 

 

 

 

 

 

 

 

 

 

 

 

 

 

 

 

 

 

 

 

 

 

 

 

 

 

 

 

 

 

 

 

 

 

 

 

 

 

 

 

 

 

 

 

 

 

 

 

 

 

 

 

 

 

 

 

 

 

 

 

 

 

 

 

 

 

 

 

경희궁지 (慶熙宮址) 사적 제271호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45 (신문로2가)

관리처~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

02-724-02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