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26일 개관한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서울가볼만한곳]

2012. 12. 29. 05:57전국 문화재와 박물관/국내 박물관

 

 

 

 

 

 

 

 

 

2012년 12월 26일 개관한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주말 가볼만한곳]

 

 

 

2012년 12월 26일 개관한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은

 개항기부터 오늘날까지 고난과 역경을 딛고 발전한

  대한민국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분야를 살펴볼 수 있는

관련 유물 1천500점을 전시 기록하여 후세에 전승하고

국민들의 자긍심과 염원을 모아 미레의 희망으로 이어가는

 역사문화공간으로 광화문이 바라다 보이는 서울의 중심에

 자리잡은 곳으로 경제기획원,문화체욱관광부 등

주요 정부청사로 사용 되었던 건물로 친환경 자재와 에너지 절감

기술을 사용하여 리모델링한 녹색문화시설 이기도 합니다.

또한 국민들의 참여로 개항(1876년)부터 현재까지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조망할 수 있는 관련 기록물

(문서, 출판·인쇄물, 사진, 동영상 등)과유품, 기념품,

 생활용품 등 역사자료의 기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문의: 기증담당자 02-3703-9303

www.much.go.kr

 

 

 

 

 

 

 

 

 

 

 

 

 

 

 

대한민국의 태동

대한민국의 태동에서는 조선이 세계에 문호를 개방한

 1876년부터,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1945년 독립에

 이르는 시기의 대한민국의 역사를 전시하고 있다.

 

 

 

 

 

 

 

 

 

 

 

 

 

 

 

 

 

 

 

자주적 근대국가의 꿈과 좌절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미국, 영국, 러시아 등 서구 열강이 조선의 문을 두드렸다.

 조정의 의견은 개화와 위정척사로 나뉘어졌고,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 등

 근대를 위한 진통이 잇따랐다.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일본군과 일본인 불량배들에 의해

 시해를 당하고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사태도 이어졌다.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임을 선언하였다. 이어

광무개혁을 추진하여 산업 발전과 교육 진흥을 통한 자주적인 근대화의 길을 모색했다.
그러나 러일전쟁을 일으켜 마지막 경쟁자 러시아를 축출한 일본은 1905년 강압적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고, 1907년에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며, 군대까지 해산시켰다.

 국권상실의 위기 속에서 각계각층의 저항운동은 이어졌다.

 

 

 

 

 

개항과 근대화의 모색, 대한제국의 선포, 국권상실

전기 의병(1894-1895, 을미의병), 중기 의병(1905-1906; 을사의병),

 후기 의병(1907-1909 ; 정미의병) 등 시기마다 의병들의 저항이 계속되었다.

헤이그 특사 파견과 같은 외교적인 노력, 국내에서의 학교 설립, 언론활동 등의

애국계몽운동,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을 비롯한 항일 의거 활동도 계속되었다.

우리 민족의 지속적인 반일 항쟁을 무력으로 철저히 진압한 일본은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한국의 국권을 강탈하였다.개항 이후 전개된

 우리 근대사는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 되어 국권이 상실되는 고난에 찬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은 저항과 자주의 길을 멈추지 않았다. 대한제국의 선포와

 의병 전쟁, 애국계몽운동의 방식으로 자주적 근대 국가의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면서 역사의 격랑에 맞서 나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잃어버린 국토를 되찾고 이 땅에 독립 국가를 세우려는 독립운동이 국권 침탈 후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전 민족적 만세 시위인 3.1운동을 일으켜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렸고, 군주제를 대신하여 모든 인민이 평등하고 자유를 누리며 주권을 가진

 민주공화제를 제창하였다. 3.1운동의 주권 의지로 수립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국현대사에서 민주공화제를 정착시키는 이정표가 되었다.‘대한제국’을 ‘대한민국’으로

새롭게 세웠으며, 봉건적 잔재를 청산하고 민주주의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독립운동은 근대화 운동의 성격을 또한 지녔다.대한민국은 헌법에 명시되었듯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였다. 이런 점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역사적 원류이자 모태이다. 임시정부는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모아

 민주적 원칙에 따라 수립된 정부였으며, 조국 광복의 날까지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국민들에게 독립정신을 일깨웠다.

 

 

 

 

 

 

 

 

 

1945년 8·15광복

한국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일본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자주 독립국가를 건설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광복의 기쁨을 만끽하였고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에 부풀었다.그러나 기쁨도 잠시였다.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의 군대가 남북을 분할 점령한 후,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가

 시작되면서 한반도는 이들의 세력 다툼 장소가 되었다. 남한에는 미군정이 들어섰고,

 북한에는 소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김일성이 권력을 장악해 갔다. 미국, 소련, 영국은

1945년 12월에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 회의에서 그 입장을 조율하여, 미소공동위원회

설치와 5년간의 신탁통치를 결의하였다. 이에 대해 한국 정국은 좌익과 우익이

신탁통치 찬성과 반대로 입장이 나뉘어져 혼란이 가중되었다. 북한에서 사회주의화가

일방적으로 추진되고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점차 분단이 기정사실화 되었다.

광복의 기쁨과 열망, 38선 설정과 민족분단, 미군정기 한국사회의 변화 이러한 가운데서도
 한편에서는 식민잔재를 하루 빨리 벗어버리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잃어버렸던 이름과 한글을 되되찾고, 공민증제를 실시하였으며, 화폐를 새롭게
발행하는 등 빠르게 사회 안정화를 추진해 나갔다. 특히 민주주의
교육을 실시해 근대국가 건설의 주역을 배출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6.25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희망을 잃지 않고근대국가 토대를 구축한불굴의 의지

[대한민국의 기초확립]에서는 대한민국정부 수립의 의미와 6.25 전쟁의 참혹한 실상

그리고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근대국가의 토대를 구축해 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또한 시민의 힘으로 지켜낸 민주주의 초석 4.19혁명의 의미를 되살펴 본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한반도에 몰아친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남한 사회는 다양한 정치세력이 난립하는

 혼란을 겪는 반면, 북한은 소련의 강력한 지원 아래에서 김일성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를 진행하였다. 이런 혼란스런 상황 속에서도

 남한에서는 참정권이 부여된 국민(만 21세 이상의 남녀)이 참여한

최초의 민주적 선거를 통해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북한의 계획된 남침, 6.25전쟁, 전쟁의 참상과 피해,
전후 복구와 원조 경제6.25 전쟁과 전후 복구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야기된 6.25전쟁은 국토의 상당 부분이 일시적으로나마

 공산군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수난을 가져왔다. 우리 국민은 사력을 다해 국가를 지켜냈으나

 전쟁 뒤에 남은 것은 막대한 인명피해와 폐허가 된 국토였다. 그러나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우리민족의 강인한 의지와 저력은 좌절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희망의 원동력이 되었다.

 

 

 

 

 

 

 

 

 

 

 

 

 

 

 

 

 

 

 

 

 

 

 

 

 

 

 

 

 

 

 

 

근대국가 토대 구축

전후 1950년대 후반은 6.25 전쟁 이후의 가장 어려운 시기였지만

오늘날의 산업화와 민주화의 토대가 구축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정부는 해외 원조를 기반으로

자립경제의 기틀을 마련하고, 의무교육을 통해 산업화 민주화의 역군이 되었던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였다. 또한 부정과 부패에 맞서 시민 스스로가 민주주의 원칙을

수호하려 했던 4.19 혁명은 민주주의가 꽃피울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4.19 혁명으로 탄생한 2공화국은 다양한 실험적 정치를 시도하였으나 5.16 군사정변으로 막을 내렸다.

 

 

 

 

 

 

 

 

 

 

 

경제개발과 산업화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대한민국은 근대국가의 위상을 확립하는 시기였다.

 남북한의 긴장상태와 대결구도는 지속되고 있었지만 정치경제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이 시기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는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초고속 경제성장을 달성하였으며,

정치적으로는 우여곡절을 거쳐 본격적인 민주화시대를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기아 삼륜트럭 T-600

 

 

 

 

 

 

 

대한민국 1호 고유모델 자동차 형대포니1

 

 

 

 

 

 

 

 

 

변모하는 도시와 농촌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과 고도성장으로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었고,

 이농현상이 본격화되었다. 급속한 산업화와 인구의 대도시 집중에 따른 이면에는

농촌소외문제, 노동문제, 도시빈민문제 등이 새로운 사회문제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교통과 통신, 대중매체가 발달함에 따라 문화가 다양해지고,

 국민들의 삶이 양적인 성장과 함께 질적인 성장으로 이어지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대한민국의 미래

1950년대, 대한민국은 세계 최빈국의 하나로 UN과 외국의 원조를 받았다.

그러나 이제는 수혜국에서 저개발 국가를 원조하고 있다. 반세기만에 이루어낸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개발도상국에 대한 공적개발원조(ODA)를 늘리고

 한국의 경제 개발 경험을 전수하고 있으며, 민간 차원의 자발적 해외봉사도 늘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은 인간과 자연이 공생하는 친환경 성장에 주력하고, 국제안보와 평화,

 그리고 세계의 공생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등 전 지구적 현안에 중심적

역할을 하며 더 큰 대한민국을 향해 나아가고자 한다.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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