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 서설(瑞雪)이 내린 사적123호 창경궁 풍경

2013. 1. 2. 05:57전국 문화재와 박물관/국가지정 문화재

 

 

 

 

 

새해 첫날 서설(瑞雪)이 내린 사적123호 창경궁 풍경

 

 

 

 

새해 첫날 서설(瑞雪)이 내린 궁궐을 돌아 봅니다

창경궁은 서울시에 있는 조선 성종때에 건축한 궁궐로

 서쪽으로 창덕궁과 붙어있고 남쪽으로 종묘와 통하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조선시대에는 창덕궁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보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창경궁의 원래 이름은 수강궁으로 세종이 즉위 하면서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것이다.그 후 성종14년

세 대비를 모시기위해 중건하고 이름을 창경궁으로 바꾸었다.

창경궁은 숙종이 인현왕후를 저주한 장희빈을 처형한 일과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일 등

궁중 비극이 있었던 곳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식물원과

동물원등 이왕가 박물관이 들어서고 이름도 창경원으로 격하되는

수난를을 겪었다. 1963년1월에 사적123호로 지정,1983년 동물원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기고 이름도 창경궁을 되찾았다.

 

 

 

행복지수 올려주실 거지요 

 

 

 

 

 

 

 

홍화문

홍화문은 창경궁의 정문으로 명정전과 마찬가지로 동향하였다.

조선 성종 15년에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광해군 8년에 재건되어 오늘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우진각지붕의 건물로, 기둥 위에는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이 놓이고,

 다포계 양식(樣式)의 외오포작 이출목, 내칠포작 삼출목의 공포를 짜았는데, 견실한 구조와 공포의 짜임은

조선 초기 형식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정면의 3칸에는 각각 판문을 달고 그 위로는 홍살을 하였으며,

북쪽에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마련돼 있다. 이층은 우물마루에 연등천장을 꾸몄다.

 홍화문의 좌우로는 궁장(宮墻)이 남북십자각을 지나 궁역을 형성하였다.

 

 

 

 

 

 

 

옥천교

홍화문을 들어서면 만나는 옥천교는 명당수가 흐르는 어구(御溝) 위에 설치한 다리다.

조선 왕궁은 모두 명당수 위의 석교를 건너서 정전으로 들어가도록 만들어졌다. 옥천교는 길이가 9.9미터

, 폭6.6미터와 두 개의 홍예로 구성되었는데,홍예가 연결되는 중앙에 귀면(鬼面)이 조각되어 잡귀를 쫓고 있다.

 다리 좌우에는 돌난간이 조각되었는데, 난간 가장자리에 법수(法首)를 세우고 네 개의 연잎 동자주(童子柱)를

 세워 5칸을 형성하고, 한 장의 돌로 만든 풍혈판이 설치되었으며 돌란대가 얹혀 있다. 교상(橋床)은 장마루 같은

 청판돌로 짜고 중앙에는 어도(御道)를 한 단 높게 만들었다. 이 다리는 1483년 조성되었다.

 

 

 

 

 


궐(闕)은 임금이 거주하면 근무하는건물 전체 지칭하는대명사입니다

 대궐궁(宮)은 대궐 건물 을 지칭하는데 용도에따라

정궁(경복궁) 별궁(창덕궁) 이궁(경희궁)으로 구분합니다


궐안에 건물 용도와 거처하는 사람에 따라 구분하며

건물 이름의 끝에 붙이는 글자에 따라 격이 높은 순으로
전 (殿) 궁(宮) 합(閤) 당(堂) 각(閣) 루(樓) 재(齋) 정(亭) 순입니다

 

 

 

 

 

 

명정전

명정전은 조선 성종 15년(1484)에 창경궁이 조성되고,

 그 정전으로서 명정전이 세워졌다.이곳은 임금님이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거나 국가적인

행사가 거행되었던 곳으로 1544년 인종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명정전은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정전과는 달리

 남향이 아닌 동향이다. 이는 창경궁의 지세에 따른 것이다. 그후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8년(1616)에 복원되어 오늘에 이른다. 다른 궁의 정전과 같이 이중의 월대를 두어 그 위에

건물 기단을 마련하고, 큰 사각 주초 위에 원형의 운두 높은 주좌(柱座)를 조각하여 초석을 배열하였다.

 

 

 

 

 

 

월대의 형식은 다른 궁의 것과 달리 지형에 맞추어 전면 동쪽과 북쪽 일부만을 이중단으로 하고,

 건물 좌우와 뒷편에서는 1단으로 하였다. 평면으로 보아 정면 5칸, 측면 3칸에 후퇴(後退)를 한

 단층 팔작기와지붕으로 겹처마이다. 평주 위에는 모서리를 많이 굴린 창방이 놓이고 운두가 낮은

 평방 위에 다포계 양식의 외삼출목, 내사출목의 공포를 짜았다. 건물 사면은 모두 꽃살창으로 돌려져 있는데,

 그 위로는 교살창이 있다  내부 바닥에는 전(塼)을 깔았고, 뒤편 중앙부에는 왕좌인 용상이 있는데

그 뒤로 일월도의 병풍이 놓였다. 그 위로는 닫집으로 짜은 보개(寶蓋)가 있고 천정의 중앙부에는

 한층을 접어올린 쌍봉문(雙鳳紋)이 있는 보개천정을 장식했으며, 그 주위는 우물반자를 하였다.

 단청은 모로단청을 하고, 특히 천정판에는 화려한 연화문의 반자초 단청(丹靑)을 시문했다.

 

 

 

 

 

 

 

월대의 전면에는 명정전 어간에 맞추어 중앙에 삼도의 이중계단이 놓였다.

가운데 어계의 폭은 2.4미터이고, 양측 협계(挾階)의 폭은 각 1.3미터이다.

상하 계단은 모두 6단씩으로, 어간의 답도(踏道) 석판 중앙에 사분심엽형(四分心葉形) 윤

곽을 양각(陽刻)한 후 그 안에 날개를 활짝 편 한쌍의 봉황을 조각해 장식했고,

챌판에도 당초(唐草)와 보상화(寶相華), 운문(雲紋) 등을 정교하게 조각하였다.

하층 계단 앞에는 명정문과 연결되는 어도가 있고 좌우에 24개의 품계석(品階石)이 있다.

 

 

 

 

 

 

 

 

 

 

 

 

 

 

 

 

 

 

 

숭문당

숭문당은 조선 경종때 건립되었으며,

순조 30년에 큰 불로 소실된 것을 그해 가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崇文堂'의 현판과

 '日監在玆'라 쓴 게판은 영조의 어필이다. 영조는 특히 학문을 숭상하고 영재를 양성하였는데,

이곳에서 친히 태학생을 접견하여 시험하기도 하고 때로는 주연(酒宴)를 베풀어 그들을 격려하기도 하였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홑처마이며, 지형에 따라 앞면에만 방형의 장초석을

사용하여 누각처럼 세웠다. 기둥 위에는 간단한 초익공의 공포를 짜았고, 기둥 사이에는

화반 없이 굴도리 밑에 장여를 받고 있는 소로만을 끼워 장식하였다.평면으로 보아 전후와 남쪽에

 퇴간을 두고 마루를 깔았으며, 가운데칸의 마루와 동선을 연결시켰고 그 좌우에 방을 놓았다.

 

 

 

 

 

 

 

 

 

 

 

 

 

 

함인정

함인정은 원래 성종 15년에 지은 인양전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인조 11년(1633)에 인경궁의 함인당을 이건하여 함인정이라 한 것이다.

이곳은 특히 영조가 문무과거에서 장원급제한 사람들을 접견하는 곳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이며,

기둥 위에는 이익공의 공포를 짜았고, 주간에는 화반 두 개씩을 놓았다.

내부에는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는데, 내진주(內陳柱)로 구획된 마루는 한 단 높게 처리하여

그 위로는 우물천정을 하고 사방둘레의 퇴간(退間)에는 연등천정을 하였다

 

 

 

 

 

 

 

 

 

 

환경전

환경전은 성종 15년에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광해군 8년에 중건하였다.

그 후 순조 30년(1830)의 큰 불로 소실되었던 것을 그 34년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곳은 창경궁의 한 내전으로 왕이 늘 거동하던 곳이며, 중종이 이곳에서 승하했고, 효명세자(익종으로 추존)가

승하했을 때는 빈궁(殯宮)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이며

기둥 위에는 이익공의 공포를 짜고 기둥간에는 두세 개씩의 화반을 놓았다.

 건물의 내부에는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고, 외진평주(外陳平柱)와 내진고주(內陣高柱)를 배열하여

 퇴량을 걸고 그 위로는 연등천장을 하고 안쪽으로는 우물반자를 하였다. 대량(大樑)은 내진고주 사이에 걸었다.

 

 

 

 

 

 

 

경춘전

경춘전은 창경궁의 내전으로 성종 14년에 건립되었다.

그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8년에 재건하였으나,

순조 30년에 불탄 것을 그 34년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이 경춘전은 정조와 헌종이 탄생한 곳이며, 현판은 순조의 어필이다.

 

 

 

 

 

 

 

 

 

 

관천대

이 관천대는 소간의(小簡儀)를 설치하여 천문을 관측하던 곳으로, 「書雲觀志」에 보면

 숙종 14년(1688)에 조성된 것이다. 원래 창덕궁 금마문 밖에 있던 것을 일제 때 창경궁으로 옮겨 왔다.

높이는 2.2미터, 넓이는 2.4*2.3미터이며, 주위에는 돌난간을 돌렸다. 대의 중앙에는 높이 99센티미터의 관측기를

설치하는 작은 대가 있고, 그 위에 넓이 73.4*52.6센티미터, 두께 24.5센티미터의 또하나의 판석이 있다.

 여기에 남북방향으로 관측기를 고정했던 5개의 구멍이 파여 있다.

 

 

 

 

 

 

 

문정전

문정전은 창경궁 창건 때 편전으로 건립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명정전과 함께 중건하였다. 1930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朝鮮古蹟圖譜」에

실린 명정전 정면 사진에 동측면의 일부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그때까지 이 전각이

 존속했던 것으로 알 수 있으나, 그후의 자세한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1984년부터 시행한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에서 건물의 기단과 동쪽에 두 곳,

서쪽 한 곳의 계단이 확인되었는데, 기단의 규모는 남북 20미터, 동서 18미터였다. 
1986년 창경궁 중창공사 때 중건되었는데, 발굴조사와 문헌 고증에 의하여 네모기둥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내삼출목, 외이출목, 단층 팔작집(38평)으로 겹처마이며 남향하여 세웠다.

 

 

 

 

 

 

 

 

 

 

 

 

 

 

통명전

통명전은 창경궁의 연조 공간으로 명정전 서북쪽에 있으며, 왕과 왕비가 생활하던 침전의 중심 건물이다.

창경궁 창건 때 세워졌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재건이 되고, 다시 이괄의 난과 정조 때 화재를 입었다

지금의 건물은 순조 34년에 중건된 것이다. 남향한 전면에는 월대를 두고 양모서리에는 청동제 드므를 놓고

 그 북쪽에 외벌대 기단 한 단을 두어 건물을 세웠다.정면은 7칸이고 측면이 4칸인 이익공계(二翼工系) 건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하였다. 지붕 위에는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고, 전후퇴칸을 두었다

북서쪽 일부의 방을 제외하고는 건물 내부 바닥에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는데, 정면으로 보아

양측에 2칸씩 방을 꾸몄음이, 1984년의 발굴조사에서 연도지(煙道址)가 노출됨으로써 확인되었다.

 

 

 

 

 

 

 

 

 

 

양화당

양화당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였던 인조가 환궁하면서

이곳에 거처한 일이 있으며, 고종 15년(1878) 철종비 철인왕후가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현판은 순조의 어필이다.정면 6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이며,

세벌대의 장대석 기단 위에 네모기둥을 세우고 초익공계 포작(包作)을 짜았다.

 기둥간에는 화반(花盤)없이 굴도리 밑에 장여를 받고 있는 소로만을 끼워 간결한 장식을 하였다.

건물의 내부에는 좌우엔 온돌방과 중앙3칸은 마루를 깔았고, 전면 중앙의 2칸에만 툇마루를

 창 없이 개방하였다. 외진평주와 내진고주 사이에는 퇴량을 걸었고, 그 위로는 연등천장을 하고,

 안쪽으로는 우물반자를 하였다. 대들보는 내진고주 사이에 걸리었다

 

 

 

 

 

 

 

 

 

 

영춘헌,집복헌(集福軒)

영춘헌은 내전 건물이며 집복헌(集福軒)은 영춘헌의 서행각으로 초창 연대는 알 수 없다.

집복헌에서는 영조 11년(1735)에 사도세자가 태어났고 정조 14년(1790) 6월에는

 순조가 태어났으며 정조는 영춘헌에서 거처하다가 재위 24년(1800) 6월 승하하였다.

순조 30년(1830) 8월 1일 오전 화재가 발생하여 환경전, 경춘전등과 함께 소실되어

 순조 34년 장남궁을 헐어다 그 재목으로 재건하였다.1983년 동물사 본관에 있던 창경원 관리 사무소가

동물사의 철거로 인하여 이곳으로 옮겨 임시 관리 사무소로 사용되다가 1986년 중건 공사 때

창경궁 관리 사무소를 신축하고 이 건물은 변형된 부분을 보수하였다영춘헌은 본채 5칸이 남향하여

 ㅡ자형을 이루고 본채의 좌우와 뒷면으로는 행각이 둘러져 있어 ㅁ자형을 이루었으며 서쪽으로

ㅁ자형의 행각이 이어져 맞붙어 있다. 주위 건물과 비교해 볼 때 통명전, 경춘전, 환경전 등은

이익공식이고 양화당은 초익공식인 데 비하여 영춘헌은 기둥의 높이도 낮고 익공의 끝을 몰익공식으로

 둥글게 굴려 초각하였으며 행각은 더욱 간결하게 굴도리집으로 처리하여 각 건물의 격을 엿볼 수 있다

 

 

 

 

 

 

 

 

 

 

풍기대

이 풍기대는 영조 8년(1732)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풍기대 위의 구멍에 깃대를 꽂고

 그 깃대에 기를 달아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재던 것으로, 방향은 24방향으로 측정하였다.

전체 높이는 228.1센티미터인데, 하부대석 높이는 92.4센티미터, 상부 팔각주의 높이는 135.7센티미터이다

 

 

 

 

 

 

성종태실

양화당의 동북쪽 구릉지 숲속에 위치하고 있다. 태실은 4각형의 지대석 위에 석종형(石鍾形)의 몸체를 놓고

 8각형의 지붕돌을 얹었으며 상륜부(相輪部)는 보주로 장식하였다. 태실비는 태실 동쪽에 있는데 귀부(龜趺)와

비신(碑身), 이수를 갖추고 있고 비신 앞면에는 "성종대왕 태실"이라 새겨져 있다. 이들은 원래 조선 제9대 성종의

태를 묻은 곳인 경기도 광주군 경안면에있었던 것인데 1928년 전국에 있는 조선 역대 임금의 태실을 대부분

 서삼릉으로 이봉하면서 원래 경기도 광주군 경안면 태전리에 있던 성종태실을 이곳으로 옮겼다고 전한다. 
 
성종은 세조 3년(1457) 덕종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예종의 뒤를 이어

 1469년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 뒤 25년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경국대전」의

 반포 등 조선의 문물 제도를 완비하는 데 힘을 기울였으며 특히 창경궁을 창건한 임금이기도 하다. 

 

 

 

 

 

 

춘당지

춘당지는 1909년에 조성된 원지(苑池)이다. 두 개의 연못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위의 것이 1,107평방미터, 아래 것이 6,483평방미터이다. 연못 속의 섬(366평방미터)은 1986년에 조성한 것이다.

춘당지가 있는 이곳은 원래 연산군이 서총대(瑞총臺) 앞 대지를 파다가 중종반정으로 중단한 곳이다.

 그 후 권농장(勸農場)의 논이 있었는데 연못으로 만들었다.

 

 

 

 

 

 

 

 

 

 

대온실(식물원)

1909년 목재와 철재, 그리고 유리로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다.

 건축당시 동양최대의 규모였으며, 열대지방의 관상식물을 비롯한 희귀한 식물을 전시하였다.

 1986년 창경궁 복원공사를 계기로 자생목본류를 중심으로 야생화를 함께 전시하고 있다.

현재 대온실은 2004년 2월 6일에 등록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었다.

 

 

 

 

 

 

 

창경궁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2-1

  02-762-4868

cgg.cha.go.kr

 

 

 

백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