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도심의 숲, 사적 199호 선·정릉 이야기

2013. 3. 8. 06:00전국 문화재와 박물관/국가지정 문화재

 

 

 

 

평화로운 도심의 숲, 사적 199호 선·정릉 이야기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선릉은 동원이강릉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원이강릉이란 하나 이상의 능이 같은 능호를 사용하지만,

 각각 다른 언덕에 조성된 능을 말한다. 선릉의 왼쪽 언덕에는

성종 계비 정현왕후의 능, 오른쪽 언덕에는 성종의 능이 배치되어 있다.

성종의 능침 봉분은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웠다.

능에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는 세조의 유교에 따라 세조의 광릉 이후

 조영된 왕릉에는 세우지 않았던 병풍석을 성종의 선릉에 다시 세운 것이다.

그 밖의 상설은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장명등의 양식은 태종의 헌릉을

 본떴으며,문석인과 무석인의 얼굴은 극히 사실적이나 몸집이 크고 입체감이 없다.

왼쪽 언덕의 왕비 능에는 병풍석 없이 난간만 돌려져 있고, 석주의 윗부분은

초기 난간의 부드러운 맛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성종릉의 문무석인이 윤곽이 굵고

강직하다면, 왕비릉의 문무석인은 그 윤곽과 조각이 섬세하고 아름답다.

 

 

 

 

 

능의 역사

 

1494년(성종 25) 12월 24일 38세의 나이로 성종이 승하하였고, 1495년(연산군 1) 1월 14일 묘호를

성종, 능호를 선릉이라 하여 같은 해 4월 6일 지금의 선릉 자리인 광주부 서면 학당리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그로부터 35년 후인 1530년(중종 25) 8월 22일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가 경복궁에서 69세의 나이로 승하하였고,

 같은 해 10월 29일 선릉에 예장되었다. 그 후 선릉은 유난히 많은 변고를 겪었는데, 그 첫 수난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선조 26) 일어났다. 『선조실록』1593년 4월 13일자의 기사에는 “왜적이

선릉과 정릉을 파헤쳐 재앙이 재궁에까지 미쳤으니 신하로서 차마 말할 수 없이 애통합니다.”라는

경기좌도 관찰사 성영의 치계와 “이 서장을 보니 몹시 망극하다. 속히 해조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치하게 하라.”는

 선조의 명이 기록되어 있다. 1625년(인조 3)에는 정자각에 불이 나 수리를 하였고, 그 다음해에는 능에도

화재가 발생하는 등 여러 차례의 수난을 겪었으나 정비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성종은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와 세자빈 한씨(훗날 소혜왕후)의 둘째 아들로 1457년(세조 3) 7월 30일 경복궁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두 달이 되기 전에 의경세자가 20세로 요절하자 할아버지인 세조가 궁중에서 키웠는데, 성품이 뛰어나고 서예와 서화에도 능하여 세조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의경세자의 동생이자 성종의 숙부인 예종이 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나, 즉위 14개월 만에 승하하자 1469년 11월 28일 성종이 그 왕위를 계승했다. 즉위 후 7년 동안은 정희대비의 수렴청정을 받다가 20세가 되는 1476년(성종 7) 친정을 시작했다.

성종은 법령을 정리하여 세조 때부터 편찬해오던 『경국대전』을 1485년(성종 16) 반포했고, 1492년(성종 23)에는 『대전속록』을 완성하여 통치의 전거가 되는 법제를 완비했다. 세조 때의 공신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신진사림세력을 등용, 훈신과 사림 간의 세력 균형을 이루게 함으로써 왕권을 안정시켰고, 조선 중기 이후 사림정치의 기반을 조성하는 등 재위 25년 동안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왕비 공혜왕후 승하 후 원자(연산군)를 낳은 숙의 윤씨를 계비로 삼았다가 행실을 문제 삼아 폐비 후 사사하였는데, 이는 훗날 연산군 폭정의 계기가 되었다.

1494년(성종 25) 12월 24일 창덕궁의 대조전에서 보령 38세로 승하했다.

 

 

 

 

 

 

성종은 백성들이 사는 것을 둘러보기 위해 자주 궐 밖을 나가 몰래 다니기를 일삼았다고 전해진다. 사람들은 왕이 궐 밖을 다니며 겪은 일화들을 입에서 입으로 전해왔다.

어느 해 겨울, 성종이 여느 때처럼 미행을 나갔을 때, 남산골 초라한 오막살이에서 글 읽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다. 담은 무너지고 서까래가 썩어가는 누추한 곳이었는데, 『춘추좌전』을 읽는 소리가 물 흐르듯 막힘이 없었다. 성종은 등불이 꺼져 불을 얻고자 한다는 핑계를 들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글을 읽던 선비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가 지은 문집을 읽어본 성종은 선비의 해박함과 그 문집의 명문에 깜짝 놀랐다. 훌륭한 학식을 갖춘 선비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어려운 살림을 하는 것이 안타까웠던 성종은 선비 몰래 쌀과 고기를 그 집에 보내고, 예정에 없던 과거령을 내렸다. 그리고는 그 선비의 문집에서 본 글을 과제로 내걸고, 선비가 과거에 응시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선비의 문집에 있던 글이 제출되자, 성종은 더 살펴볼 것도 없이 그 글을 장원급제를 시켰다.

그런데 글을 지은 사람의 이름이 그 선비의 이름이 아니었다. 이상하게 여겨 장원급제자를 들이라 하였는데, 주인공은 선비가 아닌 새파란 젊은이였다. 자초지종을 묻자 젊은이는 “그 글은 스승의 글이었으며, 스승께서 이번 과거를 꼭 보시려고 했으나, 며칠 전 굶주리다가 갑자기 먹은 고기 때문에 크게 병이 나셨다.”고 답하였다. 성종은 안타까움에 크게 탄식하였다고 한다.

 

 

 

 

 

 

 

 

 

 

 

 

 

 

 

 

 

재실

 

 

 

 

 

 

 

 

 

 

정릉

 

조선 제11대왕 중종의 능으로 중종이 1544년 왕위에 오른 지 39년 만에 죽자 원비(元妃) 장경왕후(章敬王后)의 희릉(禧陵)과 동원(同原)에 능을 써서 동원이강(同原異岡)을 이루고 있었으나,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보우(普雨)와 의논하여 풍수상 불길하다 하여 현위치로 옮겨왔다.

이는 문정왕후 자신의 후일을 위한 것이며, 보우는 옮겨진 능이 그가 있는 봉은사(奉恩寺) 곁인만큼 자기세력을 굳히는 데 유리하다 생각된 데서 그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능의 지대가 낮아서 장마철이면 재실(齋室)까지 물이 드는 상태여서 지대를 높이는 데 많은 비용이 들었으며, 문정왕후가 승하하자 비릉(妃陵)을 다른 곳에 택해야 하였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에 의하여 왕릉이 파헤쳐지고 자궁(梓宮 : 왕의 관)이 불태워지는 변고를 당하기도 하였다.

모든 능상설(陵象設)은 『국조오례의』에 준하였으며 선릉(宣陵 : 성종의 능)의 제도와 석물제도를 본떴다. 봉토기부(封土基部)에 운채(雲彩 : 구름이 떠 있는 모양)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새겨진 병석(屛石)을 돌리고 있다. 이 능을 보호하기 위하여 직장 1원과 참봉 1원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