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제57호 한산성 온전히 걸어보기~9,05km 완주 [사적제57호/세계문화유산]

2014. 10. 15. 21:07전국 문화재와 박물관/국가지정 문화재

 

 

 

 

사적제57호 남한산성 온전히 걸어보기~9,05km 완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 9,05km 온전하게 걷기를 마무리 합니다

남한산성은 수차에 걸쳐 다녔지만 온전하게 성곽길을

걸은적이 없어 이번에는 마음먹고 돌아보게 된 성곽길을

남문(지화문)에서 마치게 됩니다 산성유원지에서 시작하여

약사사,남문(지화문),제2남옹성,남장대터와 동문(좌익문),

송암정터,장경사,남한산성여장,동장대터, 봉암성암문,북문,

북장대터,국청사,서문(우익문),수어장대,남문까지입니다

 

 

 

 

 

서문(우익문)

 

남한산성의 서문은 북서쪽 해발 450m 지점에

경사가 심한 곳에 위치하여 물자를 이송하기는 어렵지만

광나루나송파나루에서 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길이다

 

 

 

 

 

 

 

 

남한산성

서울 남동쪽 방향의 25km거리에 위치한

남한산에 조선시대에 축조한 9,05km 길이의

석성으로 유사시 임시수도로 사용할수 있게 설계하였다

남한산성은 승군을 동원하여 축성하였고 승군들이 산성을

지켰고 이러한 목적으로 산성내에 10개의 사찰이 세워졌다

그러나 병자호란을 피해 남한산성으로 들어온 인조는 청나라

 군사에 버티지 못하고 성문을 열고 세자와 함께 청태종에게 무릅을

 꿇는 수모를 당하고 세자는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다

 

 

 

 

 

 

 

 

 

 

 

 

 

 

 

 

 

 

 

 

 

 

병암남성신수비

 

병암남성신수비는 성곽의 건축실명제를 이해할수 있는

중요한 금석문으로 정조3년 6월 18일까지 남한산서을 보수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비문에는 증,개축에 들어간 돈과 물자,

그리고 18개 구역으로 나누어 담당한 18패장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두개의 바위로 이루어져 있으며 병암이란 글자가 또렸하다

 

 

 

 

 

 

 

 

 

 

 

 

 

 

 

 

 

 

 

 

 

 

 

청량당

 

청량당 경기도유형문화재 제3호로 본당은 목조 단층 건물이다

본당의 전면에 이회의 초상화와 좌, 우는 벽암대사와 이회의 처첩 초상화가

각각 봉안되어 있다  6·25전쟁 때 소실되어 지금것은 새로 만들었다 이회는 인조 2년

남한산성을 축성시 성의 동남쪽을 맡았던 공역의 책임자나 모략을 받는다 축성 경비를 탕진하였고

부실공사로 기일 안에 마치지 못했다느 무고한 모략을 받아 사형을 당하게 된다 그의 처첩도 남편이

성 쌓는 일을 도우려 축성자금을 마련하여 돌아오다 남편이 처형소식을 듣고는 강물에 투신해 자살하였다
이회를 참수할 때 그의 목에서 한 마리의 매가 날아 나와서 근처의 바위에 앉아 사람들을 노려보다가 날아갔다고 한다

 이를 기이하게 여겨서 그의 공사구간을 재조사해 보니 모략과 달리 견고하고 충실하게 축조되어 있어 무죄가 밝혀졌다

이에 서장대 옆에 사당을 짓고 이회와 그의 처첩의 넋을 달랬다고 한다 지금도 해마다 한 차례씩 지방 무속인들이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당시 매가 앉았던 바위를 매바위라 부르며 서장대 마당에서 볼수있다

 

 

 

 

 

 

 

 

 

 

 

 

수어장대

 

남한산성 서쪽의 수어장대는 남한산성 4장대 중의 하곳으

 인조때 군사시설로 지은 누각으로 수어장대란 군사의 지휘를 맡은 수어사가

 지휘와 명령하는 곳으로 건립시에는 단층누각으로 '서장대'라 하였다 이후에

 영조27년  2층 누각을 증축해 내편은 무망루, 외편은 수어장대라 이름 붙였다

 이곳은 인조14년 병자호란때 인조가 직접 수성군을 지휘하여 청태종의 12만 대군에

맞서 45일간 항전으로 버티다가 결국 45일만에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했다

 

 

 

 

 

 

 

 

 

 

 

 

 

‘무망루’란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굴욕적인 시련과

아들 효종이 청나라에 대한 복수로 북쪽의 땅을 빼앗으려다

실패하고 죽은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붙이게된 이름이다

 

 


 

 

 

 

 

 

 

 

 

 

 

 

 

 

 

 

 

 

 

 

 

 

 

 

 

 

 

남문(지화문)

 

남한산성의 서남쪽 해발 370m 지점에 위치한 성문으로 

남한산성의 사대문 중에 가장 크고 웅장하다 병자호란때

인조가 산성으로 피신할때 이 문을 통해 들어왔다

 정조 3년에 성곽을 개축하여 지화문이라 불렀다

 

 

 

 

 

남한산성 비석군

 

성내에 있던 비석들을 한곳에 모아놓은 곳으로

공덕비,선정비등 30기의 비석들이 남문아래에 있다

 

 

남문아래 산성터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