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여행] 보물 제165호 강릉 오죽헌 (江陵 烏竹軒)

2011. 12. 5. 18:30전국 방방곡곡 여행지/강원도 여행지

[강릉여행] 강릉 오죽헌 (江陵 烏竹軒)

 

강원 강릉시  죽헌동 201에 위치한 신사임당(1504∼1551)과

 율곡 이이(1536∼1584)가 태어난 유서 깊은 집이다.
사임당 신씨는 뛰어난 여류 예술가였고 현모양처의 본보기가 되는 인물이며,

신씨의 아들 율곡 이이는 조선시대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훌륭한 학자였다.
오죽헌은 조선시대 문신이었던 최치운(1390∼1440)이 지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앞면에서 보면

왼쪽 2칸은 대청마루로 사용했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만들었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부재들도 새부리 모양으로 빠져나오는

 간결한 형태로 짜은 익공계 양식으로 꾸몄다.
우리나라 주택 건축물 중에서 비교적 오래된 건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며,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진 건물이다.

 

 

 

 

 

 

 

 

 

이이(李珥, 1536년 음력 12월 26일 ~ 1584년 음력 1월 16일)조선시대의 문신, 성리학자이며 정치가, 사상가, 교육자, 작가, 시인이다. 관직은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성혼과 함께 기호 지역이 기반인 서인(西人)의 종주로 추앙된다.

아홉 차례의 과거에 급제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16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이 죽자 3년간 여묘살이를 한 후, 아버지가 계모 권씨를 들인 뒤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는데, 이 때문에 훗날 그가 죽은 후에까지도 머리 깎고 중이 되려다가 환속한 자 라고 동인과 남인이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다.

 

 

 

 

 

 

 

오죽(烏竹)벼과 왕대속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식물로, 학명은 Phyllostachys nigra이다. 검정대, 흑죽, 분죽이라고도 한다.

중국이 원산지로 높이 약 7m이다. 줄기의 색은 처음에는 녹색이나, 가을 무렵부터 멜라닌 색소가 증가하여 검정으로 변한다.

색의 농담이나 변하는 방식은 입지에 따라 다르다. 양지바른 건조지에서는 선명한 검정을 띤다

줄기가 잘 휘어지므로 낚싯대로 쓰이고, 또 공예품의 소재로 쓰인다. 줄기의 색이 검기 때문에 사람의 눈을 많이 끌어 정원에 심거나 분재로 애용한다

 

 

 

 

 

 

 

 

 

 

 

 

 

 

 

 

문성사(文成祠)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영정(影幀)을 모신 사당이다. 이 자리에는 원래 어제각이 있었는데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 때 헐어내고 문성사를 지었다. “문성(文成)”은 1624년 인조임금이 율곡에게 내린 시호(諡號)로, “도덕과 학문을 널리 들어 막힘없이 통했으며 백성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정사(政事)의 근본을 세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봉안된 영정은 이당 김은호 (以堂 金殷鎬)가 그린 것으로 1975년 표준 영정으로 선정되었다.

 

 

 

 

 

 

 

 

 

오죽헌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3칸,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 양식이다.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태어난 집으로 조선 중종 때 건축되었다. 

 

 

 

 

 

 

 

 

 

 

 

 

 

 

 

안채,바깥채

 

 

 

 

어제각

조선 중기의 학자·정치가 이이(李珥)의 유품.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호

 

율곡 이이가 쓰던 벼루와 토지 양여서이다.
벼루는 가운데가 타원형으로 오목하게 패여 있고, 위쪽과 아래쪽에 나뭇가지와 잎사귀를 양각하였다.

벼루의 뒷면에는 글씨가 새겨 있는데, 정조 12년(1788)에 정조가 율곡 이이의 유품이 강릉에 있다는 말을 듣고 직접 보시고,

쓰신 것을 그대로 새긴 것이다. 보신 후 율곡의 유품을 소중히 보존하기 위해 어제각이라는 건물을 지어 보관하도록 하였다.
토지 양여서는 율곡이 그의 소유의 토지를 이종 권처균(權處均)에게 양여 한다는 증서로, 계약서나 각서와 같은 성질의 문서이다.

이 문서는 선조 12년(1579)에 율곡이 친필로 작성한 것으로, 이 때 율곡은 벼슬을 버리고 해주 석담에 가서 은거하고 있을 때였다.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년 ~ 1551년)조선 시대 중기의 문인이자 화가, 작가, 시인이었다. 조선시대 중기의 성리학자 겸 정치인 이이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강원도 출신으로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5만권의 도안 인물이기도 하다.

태교에서부터 정성을 기울여 아들 주나라 문왕을 얻은 현숙한 부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의미에서 사임당(師任堂)으로 아호를 정하였다.

 

 

 

 

 

신사임당강원도 강릉 태생으로 그의 생가 오죽헌은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사임당의 형제 중에는 아들은 하나도 없고 딸만 다섯이었는데, 사임당은 그 중에서 둘째 딸이었다. 본명은 신인선이었다. 아버지는 신명화(申命和)라는 이름의 선비였고, 어머니는 용인 이씨 집안의 선비인 이사온의 딸이었다. 스스로 사임당(師任堂)이라는 호를 지었는데, 주나라의 기틀을 닦은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에서 따왔다고 전한다.

아버지 신명화는 조광조등과 친분이 있었으나, 기묘사화로 선비들이 희생되자 관직을 단념하고 강원도 강릉으로 낙향하였다. 신사임당을 비롯한 다섯 딸들은 신명화에게 천자문동몽선습, 명심보감,유교의 사서 육경과 주자를 배움으로써 일찍부터 성리학학문적 소양을 갖추었다.

그래서 작가 오귀환은 사임당이라는 호에는 신사임당의 혁명을 꿈꾸는 여인으로서의 기상이 담겨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그 외에 인임당(姻姙堂) 또는 임사제(姙師齊)라는 호도 가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