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6. 17. 06:00ㆍ전국 절집이야기/사찰(寺刹) 이야기
[금산여행] 나무 천년, 절집 천년 보석사
“금산의 보석사” 하면 은행나무를 이야기 한다. 그런가하면 “금산의 은행나무” 하면 보석사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수령 천여 년의 은행나무와 신라 때 창건된 보석사는 천년의 세월을 함께해 온 천년지기. 신라 때 창건하여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고 조선후기에 중건한 보석사의 영고성쇠를 묵묵히 지켜본 보석사의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 제365호로, 보석사대웅전은 충남 유형문화재 제143호로서 지정․관리 되고 있는 금산의 명물과 명소이다.
통일신라 현강왕 12년(886) 조구대사가 창건했다는 금산 진악산 남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보석사의 당우는 조선후기 명성왕후가 중창하여 원당으로 삼으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불전인 대웅전은 앞면 두 칸 옆면 세 칸의 겹처마 맞배집으로 다포계양식 주불전을 장엄하고 있다. 절 마당을 사이에 두고 대웅전이 마주보이는 자리에 있는 요사채 의선각은 영규대사가 공주 갑사와 보석사를 오가며 수도를 하면서 보석사에 오면 거처한 곳이다.
주불전의 오른쪽에서 뒤로 약간 물러선 자리에는 보석사의 영각 기허당이 위치하고 있다. 앞면 세칸 옆면 한 칸의 겹처마 맞배집으로 소탈한 주심포양식으로 지어 규모 면에서나 외양에서 대웅전보다는 한층 격을 낮춰 지은 집이다. 영각의 이름을 ‘기허당’이라 한 것은 기허당 영규대사의 법명을 따서 지은 것으로 영규대사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지은 집이기 때문이다. 그 외 기허당의 오른쪽 뒤 언덕에 산신각이 위치하고 있다.
보석사 주차장을 벗어나면 바로 숲으로 들어서고 일주문이 반긴다
비각에서 시작되는 전나무숲길은 짧지만 아름답다. 하늘을 찌를 듯 곧게 하늘을 향하여 줄기를 뻗은 거대한 전나무들이 길을 사이에 두고 도열하듯 서있어 자연의 웅장함을 느끼고, 더불어 푸른 녹음과 함께 숲의 싱그러움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보석사 앞의 전나무숲길. 보석사를 탐방하려면 이 숲을 지나 은행나무를 보고 다리를 건너 경내로 이동하는 코스를 택하는 것이 좋다. 종무소에서도 이 코스를 권하고 있다. 아마도 숲을 거닐며 마음을 정화하고 절 앞의 내를 건너며 마음을 씻고 도량으로 들어서라는 의미일 것이다.
보석사 가는 길에 만난 의승장 영규대사
전나무에 이끌려 다가서다 길가의 보호각 앞에서 발길을 멈춰 볼 일이다. 700의총의 승병장 영규대사의 ‘의병승장비’보호각이이 있기 때문이다. 의병승장비는 숙종 5년(1839) 금산군수 조취영이 세운 비로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비각을 부수고 비를 땅에 묻는 만행을 저지른 일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해방후 비를 다시 세우고 보호각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을 지키는 영험한 나무, 보석사 은행나무
전나무 숲의 끝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은행나무는 바라보는 순간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이가 약 1,000살 이상 될 것으로 추정되는 이 나무는 높이 34m, 가슴높이의 둘레 10.72m의 크기로 뿌리부분에 2∼3m 높이의 새로 난 싹이 수없이 돋아나 신기하게 보인다. 이 나무는 마을에 큰 일이 생길 것 같으면 소리를 내어 미리 알려준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마을을 지키고 보호해주는 신성한 나무로 여기고 있다.
조구대사가 보석사 창건(886년) 무렵 제자와 함께 심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1945년 광복 때와 1950년 전란 때, 1992년 극심한 가뭄 때 소리 내어 울었다고 전해진다.
금산 보석사 은행나무(錦山 寶石寺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365호
분류: 자연유산, 천연기념물, 문화역사기념물, 민속
수량․면적: 1그루,122㎡(보호구역) / 지정(등록)일 1990.08.02
영규대사가 보석사에 거처하며 수도를 했던 의선각 전면
보석사 경내를 돌아보자면 영규대사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당우가 지금도 남아있다. 영규대사가 공주의 갑사와 금산의 보석사를 오가며 수도했던 의선각과 대사의 영정을 봉안 되어있는 기허당(騎虛堂)이 그것이다. 기허당은 영규대사의 법명으로 대사의 법명을 당우의 이름으로 새길만큼 보석사와 대사의 인연은 각별하다.
보석사대웅전(寶石寺大雄殿)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43호
분류: 유적건조물-종교신앙, 불교, 불전 / 수량: 1동 / 지정(등록)일 1993.11.12
임진왜란 3대 승장의 한분인 영규대사 (보석사 기허당 내부에 봉안 돼 있는 영규대사 영정)
임진왜란 때 왜군과 맞서 싸운 3분의 대표적 승장이 있다. 한양을 수복하는데 공을 세운 서산대사(1520~1604), 평양을 수복하는데 공을 세운 사명대사(1544~1610), 청주성을 수복하는데 공을 세운 영규대사(?~1592) 등이 그들이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여생을 마쳤지만 영규대사는 금산전투에서 왜군과 맞서 싸우다 부상을 입고 전사한 비운의 인물이다.
영규대사는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스로 승병장이 되어 승병 1천명을 모집하여 왜군에 맞서 싸울 준비를 하였다. 이후 영규대사는 청주성 탈환을 위한 전투에 임하게 되는데, 청주성을 점령한 왜군들은 청주 남방에 위치한 호서지방을 점령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당시는 청주 방어사 이옥의 관군이 무너지고 오로지 승장 영규대사의 군대만이 홀로 적병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 방어사 이옥의 잔류군사와 의병장 중봉조헌이 이끄는 의병과 함께 합군(合軍)하여 청주성을 공략, 혈전에 혈전을 거듭한 끝에 청주성을 수복하기에 이른다.
청주성의 수복은 청주지역의 수복만이 아니라 왜군이 호남지역과 충청도로 진출하는데 교두보역할을 할 수 있는 거점을 빼앗은 큰 쾌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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