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6. 11. 06:00ㆍ우리 문화예술 공연전시 /문학관,미술관,기념관
[옥천여행] 민족시인 정지용 생가와 문학관
시인 정지용(鄭芝溶 1902~1950)은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40-1번지에서
1902년 5월 15일(음력)에 태어났다. 정지용은 이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생가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옥천공립보통학교(현재의 죽향초등학교)에 다녔으며,
14살 때에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집을 떠나 객지생활을 시작하였다.
정지용의 본래 생가는 1974년에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다른 집이 들어섰으나,
1996년 7월 30일에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었다.
생가 앞으로는 정지용의 대표시 (향수)의 첫 문장에 등장하는 실개천이 흐르고 있다.
부엌이 딸린 안채와 행랑채 등 2동의 一자형 초가(草家)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엉을 얹은 흙돌담으로 둘러져 있고, 두 개의 사립문이 있다. 생가 옆으로
물레방아와 정지용동상 등으로 꾸민 작은 공원이 있고,
그 옆으로 정지용문학관이 자리 잡고 있다.
향수(鄕愁)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傳說)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민족시인 정지용은 해방 직후 모교의 교사직을 사직하고 이화여전(梨花女專) 교수로 취임했다. 담당과목은 한국어, 영어, 라틴어였다. 교수직을 오래 계속하지는 못했는데, 당시 기록을 보면 45년 10월부터 48년 2월까지 재직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는 46년 『경향신문』의 주간으로 취임하여 일년간 사설과 여적(餘滴)을 담당했다. 이 기간에 그는 교수직과 주간직을 겸했다.
해방 후 그는 거의 시를 쓰지 못했다. 5년 동안 시 『곡마단』과 기념시 2편과 시조 5수 이외에는 작품이 없다. 당시 좌우익으로 대립되어 사회가 극도로 혼란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의 진로와 장래가 불투명한 정치상황에서 그는 방황했던 것이다.
이러한 관계당국의 입장과는 달리 학계에서는 지용의 강제 납북설을 제기하며 문인들과 함께 그의 해금운동을 벌였다. 이러한 활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학자가 김학동 교수였다. 김교수는 지용 가족들의 증언과 원로 문인들의 회고담과 월남한 인사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납북설의 근거를 꼼꼼하게 제시했다. 이러한 노력이 지용을 포함한 판금작품의 해금과 민족문학의 자산을 되찾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와 문학사적 업적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김교수의 노력으로 정지용의 납북설은 학계에 정설이 되었다.
납·월북작가들의 작품이 해금된 지금, 월북이냐 납북이냐를 논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지용의 문학이요 그의 신념이다. 그가 비록 민족의 미래가 불투명한 해방공간에서 방황했으나 분명한 것은 그가 민족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반탁일로(反託一路)의 결산이 양군 조속 동시 철퇴 이외엔 다른 기로(岐路)가 있을 리 없다. 시종일여히 반탁투쟁에 변절 없는 분은 대백범(大白凡)옹뿐이시다.(지금 이후로 백범옹(白凡翁)께 신문기자들은 최경어를 사용해라)
이 글은 『남북회담에 그치랴』라는 지용의 글이다. 여기서 그가 백범 노선을 따르는 민족주의자였음을 분명히 읽을 수 있다. 그는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방향을 신탁통치 반대와 미소 양군 철수 그리고 통일정부 수립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런 점으로 보아 그는 이상주의적 순수민족주의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자네 월북이 잘못인고 하니 양군정철퇴(兩軍政撤退)를 촉구하여 조국의 통일 독립이 빠르기까지 다시 완전자주 이후 무궁한 연월까지 자네가 민족의 소설가로 버티지 않고 볼 수 없이 빨리 38선을 넘은 것일세. 자네가 넘어간 후 자네 소설이 팔리지 않고 자네 독자가 없이 되었네. 옛 친구를 자네가 끊고 간 것이지 내가 어찌 자네를 외적으로 도전하겠는가. 자네들은 우리를 라디오로 욕을 가끔 한다고 하더니만 나도 자네를 향하여 응수하기에는 좀 점잖어졌는가 하네.
38선이 장벽이 아니라, 자네의 월북이 바로 분열이요, 이탈이 되고 말었네. …빨리 빠져올 도리 없거던 조국의 화평무혈통일을 위하여 끝까지 붓을 칼삼어 싸우고 오라.
『소설가 이태준군 조국의 서울로 돌아오라』는 지용의 이 편지는 6 · 25가 발발하던 그 해 1월에 발표한 글이다. 이 글 속에서도 양군 철수와 화평 무혈통일을 주장하고 있어 지용의 이상적 민족주의를 느낄 수 있다. 그는 이 편지에서 상허의 월북은 분단을 고착시키는 일이요 민족 소설가이기를 포기하는 길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사실을 잘 아는 지용이, 월북이 자신의 시를 버리는 길이요, 민족시인이기를 포기하는 길이라는 것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가 전생애를 통하여 가장 사랑했던 시와 가정을 버리고 월북을 택할 리는 없는 것이다.
당시 그가 좌우익의 정치 · 문학파쟁에 휘말려 혼란을 겪은 것은 사실이지만 일관된 하나의 신념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평화통일과 자주국가 건설이요, 그러한 국가에서 자신이 영원한 민족시인으로 남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순수한 민족주의자였다. 그의 비극적 종말은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채 6 · 25 전쟁 중에 폭사했다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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