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6. 24. 16:00ㆍ우리 문화예술 공연전시 /문학관,미술관,기념관
[서울 가볼만한곳]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전쟁기념관)
호국 자료의 수집·보존·전시, 전쟁의 교훈과
호국정신 배양, 선열들의 호국 위훈 추모를 목적으로
1990년 9월 착공해 1993년 12월 완공하고, 1994년 6월 10일 개관한 기념관이다.
연건평 2만 5천 평에 지하 2층, 지상 4층 규모이며, 호국추모실·전쟁역사실
·한국전쟁실·해외파병실·국군발전실·대형장비실 등 6개 전시실로 구분되어 있다.
기념관 자료의 수집·보존·관리·전시·조사·연구 외에 기념관 자료 및
기념사업에 관한 홍보·교육, 기념관 관련 각종 간행물의 제작 및 배부,
전쟁에 관한 학예 활동, 전쟁사 연구 등 전쟁 관련 사업을 수행한다.
호국추모실은 역대 수많은 전쟁에서 국가를 지킨 선열들의 호국 정신과
위업을 기리고 민족 자존의 혼을 되새기는 공간으로, 16만여 명에 달하는
전사자 명부가 봉안되어 있고, 귀면무늬의 수호상, 호국 인물들의 흉상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전쟁역사실에는 선사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각종 대외항쟁 군사자료,
무기와 장비, 호국선열들의 위업 등에 관한 자료들이 시대별로 구분·전시되어 있다.
평화는 부르짖는게 아니라 지켜내는 것이다.
6, 25 전쟁 조형물을 세우는 뜻
1950년 6월 25일 미명 북한의 불법남침으로 일어난 골육상진의 비극은
400여만명의 인명 살상가 1000여만명의 이산가족 그리고 230억불로 추산되는 전국토의 큰 재산 손실을 입혔다.
우리 대학민국의 국군은 자유민족주의를 지키고 민족의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서 21개국의 유엔군과 더불어
목숨을 바쳐 싸웠으니 3년 1게월 2일의 그 전쟁은 1953년 7월 정전 협정으로 휴전을 맞게 되었다.
그 뒤 반세기가 지나는 동안 병기는 황폐한 땅을 일구는 보습이 되고 포연은 공장의 굴뚝연기로 변하고
포성은 사랑의 종소리로 바뀌어 이땅에 복지와 평화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에 우리는 이 전쟁의 비극을 되새겨 전쟁으로 희생된 분에게 향불을 피우고
우리 후손들에게는 영원한 평화를 다짐하는 전쟁조형물을 이곳에 세워 통일의 그날을 기약하고자 한다.
형제의상
6.25전쟁을 상징하는 '형제의상' 조형물은 직경이 18m이고 높이는 11m로써, 상부,하부,내부로 구성되어 있다.
상부의 청동상은 6.25전쟁 당시 한국군과 북한군의 형제가 원주 치악 고개 전투에서 극적으로 만난 순간을 재연한 것이다.
총을 어깨에 메고 철모를 쓴 장교는 형으로서 한국군 제8사단 제 16연대의 박규철 소위이고, 그형에게 얼싸안긴
인민군 복장의 병사는 북한군 제8사단 제83연대 박용철 하전사이다. 적대의사가 없는 형이 어린 아우를 품에 안은
모습에서 화해의사랑, 용서의 의미를 엿볼수 있다. 하부의 반구형 돔은 국민적 총화단결의 의미로 전국에서 수집한
화강석조각으로 고분의 이미지를 살려 쌓았는데, 이는 수많은 순국선열들의 희생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동서쪽으로
찢어진 돔이 위로 갈수록 아물어진 상태는 분단의 상처가 치유되어 남북통일이 이루어질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반구형의 돔 내부에는 모자이크 벽화와 6.25전쟁 당시 전투부대를 파병한 유엔군 참전 16개국의 지도 조형판이
설치되어있다. 벽화중 남쪽은 민족의 얼을 ㅍ현한 작품이며, 북쪽의 벽화는 6.25전쟁의 국난을 전 국민이 총력으로
극복한것을 나타낸 것이다. 천장에 여러개의 쇠줄로 엮어 놓은것은 남북이 다시는 분단되지 않도록 하는 통일의 결속을
표출한 것이며, 갈라진 틈을 매우고 있는 스테인드 글라스는 우리 민족의 피와 땀, 슬픔과 환희를 표현한 작품이다.
김풍익 육군 중령
1921충청남도 예산출생. 1948년 육군 소위 임관 1950년 6월 26일 포병대대장으로서 남하하는 적 전차를 저지하기 위해 105미리 포로 자일리 부근의 북한군 진지에 포격을 가하였으나 T-34전차는 의정부 북방 4km 지점인 축령 부근까지 밀고 내려왔다. 김중령은 105미리 곡사포 1문을 이끌고 진두지휘하여 접근해 오는 적 전차를 근거리 직접 조준 사격으로 파괴하였다. 죽음을 무릅쓴 김중령의포격은 적의 후속전차를 저지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나, 제2탄을 장전하여 다시 발사하려는 순간 적의 직격탄에 의해 대원들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다. 정부는 김풍익 중령의 투철한 군인 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1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을 추서 하였다.
북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 한국전쟁 그리고 피난생활
피난행렬과 피난지의 천막학교
피난 생활
6.25저쟁은 노인과 부녀자 어린아이등 모든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피난민들은 비바람과 추위를 피하기위해 판자,깡통,가마니,C 레이션 상자, 볏짚등으로 집을 짓고,
시레기죽,꿀꿀이죽 나무껍질등으로 끼니를 때웠다. 어린아이들은 미군병사가 나누어 주는
초콜릿을 얻기위해 몰려들었고, 구호단체의 우유죽 배급소에는 사람들로 긴 행렬을 이루고 있엇다.
시장거리에서는 담배를 팔거나 구걸하는 소년, 숯을파는소녀, 상이용사, 지게꾼을 쉽게 볼수 있었다.
유엔군의 한국전쟁 파병
유엔기념공원
2007년 10월 24일 등록문화재 제359호로 지정되었다. 유엔기념공원(UNMCK)은
1951년 유엔군(United Nations Forces:국제연합군) 사령부가 6·25전쟁 당시 한국에 파병되었던
유엔군 전몰장병들의 유해를 안장하기 위하여 재한유엔기념공원으로 조성한 유엔군 묘지이다.
유엔군 사령부는 개성, 인천, 대전, 마산 등지에 흩어져 있던 유해를 이곳으로 이장하여 안치하였다.
처음에는 미국, 벨기에, 프랑스,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그리스, 인도, 필리핀, 타이 등의
11,000위가 봉안되어 있었으나 대부분 자국으로 송환되고 현재는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프랑스, 네덜란드,뉴질랜드, 터키, 미국, 영국 등 11개국의 2,300여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월남파병
공산군과 전쟁중인 월남공화국을 돕기 위해 행한 우리 나라 최초의 국군 해외파병
국군의 국외 파병은 1964년 9월 베트남 전쟁에 의료진 130명과
태권도 교관10명을 보낸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4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베트남전에 처음 의료진과 태권도 교관을 보낼 당시 여야는 대체로 원만한 합의를 보았으나,
전투부대 파병안이 제기되면서 여야간 입장차가 심해졌다. 당시 여당인 민주공화당은
야당의 반대가 거세자 여당단독으로 국회를 열고 65년 3월13일 전투병 파병안을 가결했다.
걸프전 파병
이후 베트남전 후유증으로 한동안 국군의 해외 파병은 없었으나 1991년 걸프전이 터지면서
다시 파병 동의안이 문제가 됐다. 그러나 유엔 결의에 의한 다국적군이 구성되고,
전후 복구사업을 위해 참전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강해지면서 비전투병파병을 조건으로
여야가 파병 동의안을 처리했고, 91년 1월부터 한달 동안
군의료진 200명과 공군 수송대 150명(수송기 5대)가 파견됐다.
PKO 참여의 일환으로 파병
이후에는 유엔 평화유지활동(PKO) 참여의 일환으로 파병이 이루어졌다.
유엔(UN) 가입 이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일정한 몫을 담당해야 한다는
논리에 따라 국회는 별다른 이의 없이 파병안을 합의 처리했다.
1993년부터 2002년까지 평화유지활동(PKO)로 파병된 지역은 △소말리아(공병 252명)
△서부사하라(의료 20명) △그루지아(옵서버 3명) △인도·파키스탄(업저버 9명)
△앙골라(공병 204명) △동티모르(보병 444명) △키프러스(사령관 중장 1명) 등 7곳이다.
국군의 해외파병역사
베트남전(64~73): 해병 청룡부대, 보병 백마부대등 4만8천명 ,걸프전(91.1~2): 군 의료진 200명, 공군 수송기 5대
아프가니스탄(2001.12~ ): 해.공군수송지원단, 공병. 의료 500여명 이라크(2003.5~ ): 건설공병지원단, 의료지원단
[유엔 평화유지활동(PKO)]소말리아(93.7~94.3): 공병대대 510명서부사하라(94.9~ ): 의료지원단 422명
그루지아(94.10~ ): 군 업저버 36명 인도·파키스탄(94.11~ ): 군 업저버 72명앙골라(95.10~97.2): 공병대대 600명
동티모르(99.10~ ): 보병부대 3,029명 키프러스(2002.1~ ): 사령관 1명
현재에도 계속되는 북한의 도발
창랑호 납북 사건 1958년 2월 16일
당포함 침몰사건 1967년 1월 19일
1.21 사태 1968년 1월 21일
푸에블로 호 납치 사건 1968년 1월 23일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1976년 8월 18일
천안함 침몰 사건
2010년 3월 26일
저녁 9시 백령도 인근 해상을
초계중이던 천안함 침몰 .
대한민국 해군병사
40명 사망 6명 실종
2010년 5월 30일 한국포함 오스트레일리아,미국,스웨덴,영국 등
4개국 54여명의 전문가로 구성된 합동조사단은 천안함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어뢰공격으로 침몰한 것이라 발표
연평도 포격
2010년 11월 23일
남측주장 : 북측이 연평도를 공격한 것은 대한민국 군의 `호국훈련`에 대한 반발이 아닌 의도적 도발이라고 밝힘.
이에 대한 증거로 비공개 보고를 통해 "군이 연평도 일대에서 실시한 훈련은 호국훈련이 아니라
단순히 주기적으로 실시되는 사격훈련"이며 사격 훈련 방향도 NLL 남쪽을 향함
북측주장 : 남측 북방한계선 NLL남쪽으로 사격훈련(매번 해오던 훈련)
이에 앞서 북측은 자신의 영해를 지키기위한 경고
전쟁기념관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1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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