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여행] 심훈문학의 산실 당진 필경사

2012. 7. 24. 17:00우리 문화예술 공연전시 /문학관,미술관,기념관

 

 

 

 

[당진여행]  심훈문학의 산실 당진 필경사

 

 

일제시대 문인인 심훈이 1934년 직접 설계하여 지은 집이다.

심훈은 소설가이자 시인으로, 그의 작품은

민족주의와 저항의식을 기본정신으로 하고 있다.

그는 이곳에서 1935년 농촌계몽소설로 유명한 대표작인 ‘상록수’를 썼다.

필경사는 한때 교회로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그의 장조카인

 고 심재영 옹이 다시 사서 관리하다가 당진군에 기증하였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이 필경사는 심훈문학의 산실이다.심훈은 1932년(1933년이란 설도 있음)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그의 아버지가 살고 있는 이 곳으로 내려와 한동안 아버지와 한집에 살면서 영원의 미소, 직녀성등을 집필하였다. 1934년에 독립하여 살집을 직접 설계하여 지은 집이 필경사이다. 필경사란 옥호는 1930년에 "그날이 오면"이란 제목으로 시집을 내려다가 일제의 필경사 잡기란 글에서 밝히고 있다. 한가지 일화를 소개하면 집 지을 터를 잡기위하여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는데 그러는 중에 아끼던 상아 빨뿌리를 잃어버렸다. 그것을 찾기 위하여 그때까지 돌아 다닌곳을 다시 되짚어 다니다가 당진군에 빨뿌리를 찾은곳이 지금의 필경사 자리였다한다. 필경사는 한때 교회로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그의 장조카인 고 심재영 옹이 되사서 관리하다가 당진군에 희사하였다. 우리나라 농촌소설의 대표작중 하나인 「상록수」는 1935년 이 집에서 집필된 소설이다. 가옥의 형태는 아담한 건물로서 팔작지붕이며 목조와 가로 18.7평(대지 200평) 지었다.

 

 

 

 

 

 

그 날이 오면

 

-심훈-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은

삼각산(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漢江) 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鐘路)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頭蓋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恨)이 남으오리까.

 

 

 

그 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鼓]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行列)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심훈의 생애

 

심훈은 1901년 9월 12일 서울 노량진 현 수도국 자리에서 조상 숭배의 관념이 철저한 부 심상정과 파평 윤씨 사이에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조선조 말 중류 가정의 출생으로 온후한 성품을 지녔고 뛰어난 재질을 지닌 여인이었다. 심훈은 본명은 대섭이고 소년 시절에는 금강생, 중국 유학 때는 백랑(白浪), 1920년 이후에 훈(薰) 이라고 썼다.

1915년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일고보(후의 경기중)에 입학하여, 작곡가 윤극영과 은행가 윤기동과 함께 미남 행렬 속에서 명석함을 자랑했다.

 1917년 3월 외족이며, 명문인 후작 이해승의 누이 전주 이씨와 혼인하여 심훈이 해영(海映)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3·1운동 때(제일고보 4학년, 19세 때)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3월 5일 피검되어 집행유예로 풀려나와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라 변장을 하고(안경을 쓰기 시작) 상해를 거쳐 항주에 이르러 지강(之江)대학 국문학과에 입학한다.

 여기에서 이동녕과 이시영 등과 알게 되고 귀국한 후 안석주 등과 교우하여 극우회를 만들기도 했다.

심훈은 손이 없어 이해영과 헤어지고 1924년 이후 동아일보의 기자로 있으면서 나라 없는 울분을 술로 달랬으나, 아무리 기생이 구애를 해도 거들떠보지도 않아 호탕하고 멋진 미남의 무관심에 기생들은 가슴만 불태웠다.

1930년 12월 24일, 심훈은 19세의 무희인 안정옥과 혼인하여, <독백> <그날이 오면> 등을 발표하다가 장남 재건과 같이 충남 당진에 내려가 창작에 전념하게 된다.

 1933년 장편 <영원의 미소>를 조선, 중앙일보에 연재하고 단편 <황공(黃公)의 최후>를 발표한다.

이해영에 대한 회고 작품이라고 하는 <직녀성>을 조선 중앙일보에 연재하여 그 고료로 부곡리에 집을 지어 '필경사'라고 불렀다. 이 필경사에서 쓴 <상록수>가 1935년 동아일보 15주년 현상모집에 당선되어 상금 5백원을 받아 그 중에서 상록학원을 설립한다.

1936년 9월 6일 대학병원에서 급서(急逝)하여 심훈의 문학은 더 펼치지 못하고 만다. 시집 <그날이 오면>이 일제의 검열로 출간되지 못하고 조선일보에 연재하던 <동방의 애인> <불사조>가 걸열로 중단되고 말아 미완성으로 끝난다.

 

 

 

 

 

 

심훈의 작품
<상록수>(1935), <황공의 최후>(1933), <탈춤>(1926) 등은 심훈의 소설세계를 조명할 수 있고, 장편과 단편, 영화소설이란 심훈의 소설의 양식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상록수>는 경성농업을 졸업하고 진학하라는 권유를 물리치고 부곡리에서 '공동경작회'를 만들어 농촌운동을 일으킨 장질 심재영을 모델로 하여 수원군 반월면 천곡리에서 활동하다가 죽은 최용신과의 허구적 로맨스를 만들어 씌어진 소설이다. <상록수>에는 심재영이 박동혁으로 최용신이 채영신으로 주인공이 되어 있고, 심재영이 한 '공동경작회'는 '농우회'로 샘골이 청석골로 바뀌어져 있으며, 심재영은 작품과의 인연으로 최용신의 무덤을 찾아보기도 했다고 한다. <상록수>는 당시 브나로드 운동의 선봉에 서서 농촌활동을 하는 박동혁과 채영신의 헌신적인 봉사와 둘 사이에 얽혀지는 사랑을 내용으로 한 소설이다. 청석골을 다듬어지고 가꾸어진 성취된 사회로 만들려는 지향적 욕구와 식민지 치하라는 존재적 현실 사이의 갈등과 그 비극적인 현실을 그린 농민소설이다.


 

 

 

 

 

 

또한, <황공의 최후>는 직업을 잃고 시골 삼촌집에 온 '나'라는 청년이 애지중지하면서 기른, 기골이 장대하고 영리한 황공이 닭과 같은 짐승을 잡아 먹는 것으로 하여 미움을 사던 중 마을사람들에 의해 보신탕용으로 죽는 처참한 최후를 본다는 내용으로 무엇인가 상징적인 내용이 담긴 단편이다.

<탈춤>은 최초의 영화소설로서, 헤경이란 한 여성을 둘러싸고 서로 사랑하는 일영, 처자가 있으면서 여러 여성을 섭렵하고 혜경이를 탐내는 지주의 아들 준상, 헤경이와 일영의 사랑을 성취시키려는 흥열의 인물이 진실한 사랑과 탐욕적인 사랑의 상극 속에서 준상의 위선적인 결혼식에서의 희극적인 결말과 혜경의 죽음으로 비극적인 종말을 보여주는 애정 삼각의 멜로드라마적인 면에서도 인물의 갈등이 심화된 작품이다. 또한 혜경의 아버지가 준상이네 집의 소작인이라는 것과 지주의 아들인 준상이 소작인인 헤경의 아버지를 협박하여 헤경이를 준상의 집에 머물게 하여 야욕을 채우려는 장치나, 준상의 처남 아이를 낳는 난심이, 준상의 아들을 데리고 온 일영, 그리고 이런 사실을 매도하는 흥열, 이 혼인식장에서 고하는 희극적이기도 한 종말은 이 영화소설의 절정을 이루어 현실의 한 단면을 예리하게 해부해서 보여주는 듯하다. 또한 삽화로 당시의 배우 나운규, 김정숙, 주삼손 등이 매장면에서 실연(實演)하는 사진을 넣은 것도 특이하다. 이 <탈춤>은 심훈이 영화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작품이기도 하다.


 

심훈기념관

 

 

 

추야장(秋夜長) - 심훈

 

귀뚜라미는 문지방을 쪼아대고
뭇벌레 덩달아 밤을 써는데
눈 감고 책상 머리에 앉았으려면
내 마음은 가볍고 무서운 생각에 눌려,
깊이 모를 바다 속으로 가라 앉는다
백 길 천 길 한정없이 가라앉는다.
그 물 속에서 가만히 눈을 뜨면
작은 걱정은 송사리 떼처럼 모여들어
머리를 마주 모았다가 흩어지고
큰 근심은 낙지박 같은 흡반으로
온 몸을 칭칭 감고 떨어질 줄 모른다.
나는 그 근심을 떼치려고 몸을 뒤튼다.

그럴 때마다 내 눈앞에 반짝 뜨이는 것이 있다.
그것은 불꽃같이 새빨간 산호다.
파아란 해초 속에서 불이 붙는 산호 가지는
내 가슴에 둘도 없는 귀여운 패물이다.
가지마다 새로운 정열을 부채질하는
꺼지지 않는 사랑의 조그만 표상이다.
바닷속은 캄캄하고 차디찬 물결이 흘러도
그 산호 가지만 움켜쥐고 놓치지 않으면
무서울 것이 없다, 괴로울 것이 없다.
불타는 사랑과 뜨거운 정열로
이 몸을 태우는 동안에는 온갖 세상 근심이
고기밥이 된다, 거품처럼 흗어지고 만다.
바람이야 삭장귀에 몸을 매달거나 말거나
나는 잠자코 내 가슴의 보배를 어루만진다.
밝을 줄 모르는 가을 밤, 깊이 모르는 바다 속에서
눈을 감고 그 산호 가지를 어루만진다.

 

 

 

 

 

 

 

 

 

 

 

 

 

심훈선생의 유품인 책상

 

 

이 책상은 심훈선생이 낙향하여 집필할때 사용했던 것이다.

상록수,직녀성 영원의미소등 다수의 작품을 이 책상에서 창작 하였다.

 

 

 

 

 

 

 

 

 

 

 

 

 

 

 

 

당진필경사 (唐津筆耕舍)

충남 당진시  송악면 부곡리 251-12

충청남도 당진시 문화체육과 041-350-35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