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여행] 백제 사비시대의 도성인 부소산성

2012. 7. 20. 06:00전국 방방곡곡 여행지/충청도 여행지

 

 

 

 

[부여여행] 백제 사비시대의 도성인 부소산성(사적 제5호)

 

 

 

 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사비시대의 도성(都城)이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사비성·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른다.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인

백제 성왕 16년(538)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이중(二重)의

성벽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성왕 22년(500)경에

 이미 산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 있던 것을

무왕 6년(605)경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한 것으로 짐작되어

백제 성곽 발달사를 보여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성곽의 형식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빙 둘러싼 테뫼식과 다시 그 주위를

감싸게 쌓은 포곡식이 혼합된 복합식 산성이다. 동·서·남문터가 남아 있으며,

북문터에는 금강으로 향하는 낮은 곳에 물을 빼는 수구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성 안에는 군창터 및 백제 때 건물터와 영일루·사비루·고란사·낙화암 등이 남아있다.

성 안에 군창터와 건물터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사시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고,

평상시에는 백마강과 부소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이용하여 왕과 귀족들이 즐기던 곳으로 쓰인 듯하다.

이 산성은 사비시대의 중심 산성으로서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를 방어한 곳으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이 산성< 山城 >은 백제< 百濟 > 성왕< 聖王 > 16년(538) 공주< 公州 >에서 이곳으로 옮겨

123년간 사용한 사비도성< 泗?都城 >의 중심산성< 中心山城 >으로 이중< 二重 >의 성벽< 城壁 >을 두른

 백제식< 百濟式 > 산성< 山城 >이다. 성내< 城內 >에는 당시의 군창터< 軍倉址 >로 전해오는 곳에서

탄화< 炭化 >된 곡식이 나오고 있으며, 사비루 < 泗?樓 >, 반월루< 半月樓 >, 고란사 < 皐蘭寺 >,

궁녀사< 宮女祠 >가 성내에 있고 유명한 낙화암 < 落花巖 >이 있어 관광지로 이름나 있는 곳이다.

 

 

 

 

 

 

 

 

 

 

 

 

 

 

 

 

 

 

 

 

 

삼충사 (三忠祠)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백제의 충신이었던 성충·흥수·계백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성충은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 때 충신으로, 좌평으로 있으면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다 옥중에서 단식을 하다 죽었다.

흥수는 백제 의자왕 20년(660) 나당연합군이 공격해 오자

탄현을 지키다 대신들의 반대로 지키지 못하고 결국은 멸망하였다.

계백은 나당연합군이 공격해 오자 결사대 5,000여명을 뽑아

지금의 연산인 황산에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1957년 지은 이 사당은 1981년 다시 지어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해마다 10월 백제문화재 때 삼충제를 지내고 있다.


 

 

 

 

 

 

백제의 충신인 성충((成忠), ?∼656), 흥수((興首), ?∼?), 계백((階伯), ?∼660)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957년에 세운 사당(祠堂)이다.

성충은 백제 의자왕 때 좌평(佐平)으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다가 투옥되어

 식음을 전폐하고 죽은 충신이다. 흥수는 나당 연합군이 공격해 오자 탄현(炭峴)을 지키라고

 의자왕에게 간곡하게 당부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계백은 신라 김유신 장군의

5만군이 황산벌로 쳐들어 오자 5천 결사대로 싸우다 황산벌에서 장렬히 전사한 장군이다.

 

 

 

 

 

 

 

 

 

 

 

 

 

 

 

 

 

 

 

 

 

 

 

 

 

 

 

 

 

 

 

영일루 (迎日樓)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1호

 

 

 

부소산 동쪽 봉우리에 자리잡고 있는 누각으로,

이곳에서 보면 멀리 공주 계룡산의 연천봉이 아득히 바라다 보인다.

원래 이곳에는 영일대가 있어서 계룡산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던 곳이라고 전한다.

이 건물은 고종 8년(1871)에 당시 홍산 군수였던 정몽화가 지은 조선시대의 관아문이다.

1964년에 지금 있는 자리인 부소산성 안으로 옮겨 세운 뒤,

집홍정이라는 건물의 이름을 영일루라고 고쳐 불렀다.

영일루는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 건물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정면에는 ‘영일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다른 관아문에 비해 그 규모가 비교적 큰 것이 특징이다.


이 영일루가 있는 이곳은 부소산(扶蘇山)의 동쪽 산봉우리에 해당된다.

 원래 이곳에는 영일대(迎日臺)가 있어서 계룡산(鷄龍山)의

연천봉(連天峰)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던 곳이라 전한다.

 지금의 건물은 1964년 5월 홍산(鴻山)에 있던 조선시대(朝鮮時代)의

관아문(官衙門)을 옮겨 세우고, 이름을 영일루라 한 것이다.

 

 

 

 

 

 

 

 

 

 

 

군창지 (軍倉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9호

 

 

백제 때 군대에서 쓸 식량을 비축해 두었던 창고터로

부소산 동쪽에 있는 부소산성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다.

군창지는 1915년 땅 속에서 불에 탄 곡식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1981년과 1982년 두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로 건물터의 규모를 자세히 밝혀냈다.

 백제 때부터 자리잡은 이곳 군창지를 조선시대에도 다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가운데에 공간을 두고 동·서·남·북으로 건물을 배치하여 ㅁ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부소산성 수혈건물지

수혈건물지 수혈이란 땅에 구멍을 낸 것을 말하며

그 위에 움집을 지어 그 옛날 병사들이 사용했다고 한다

 

 

 

 

 

반월루(半月樓)

 백마강(白馬江)이 반달모양으로 끼고 도는 부소산 (扶蘇山) 남쪽 마루에 있으며

 부여 시가지(市街地) 전경(全景)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이다

 

 

 

 

 

 

 

 

 

 

 

 

백화정 (百花亭)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8호

 

 

백제 멸망 당시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에 지은 정자이다.

‘백화정’이란 이름은 중국의 시인인 소동파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부소산성 북쪽 백마강변의 험준한 바위 위에 자리잡고 있다.

건물 구조는 육각형 평면을 가진 육모지붕으로 꾸몄다. 마루 바닥 주변에는

 간단한 난간을 설치하였고, 천장에는 여러가지 연꽃무늬를 그려 놓았다.


부소산성(扶蘇山城) 북쪽 백마강변의 험준한 바위 위에 평면을 6각형으로 지은 정자(亭子)이다.

백제 멸망 당시 궁녀들이 이곳의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죽은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하여 1929년에 세운 것이다.

정자의 바닥을 지반에서 높이 뛰우고 남쪽에 나무 계단 하나를 두어 출입할 수 있게 했다.

 마루 바닥 주변에는 간단한 평난간을 설치해 두었다. 천장에는 여러 가지

연꽃 문양(紋樣)을 그려 놓았다. 정자에 올라서서 보면 주변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낙화암

백제 신민의 눈물 수건을 흠뻑 적셨지만

당당하고 충성스런 이 몇이나 될까?

만약 당시에 낙화암이 없었더라면

옛 나라 강산은 쓸쓸한 봄이겠지

 

 

 

 

 

 

낙화암 (落花岩)

 

 

백마강변의 부소산 서쪽 낭떠러지 바위를 가리켜 낙화암이라 부른다.



낙화암은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 때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일시에 수륙양면으로 쳐들어와

왕성(王城)에 육박하자, 궁녀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이곳에 와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깊은 물에 몸을 던진 곳이라 한다. 『삼국유사』, 『백제고기』에 의하면 이곳의 원래 이름은

 타사암이었다고 하는데, 뒷날에 와서 궁녀들을 꽃에 비유하여 낙화암이라고 고쳐 불렀다.
낙화암 꼭대기에는 백화정이란 정자가 있는데,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서

 1929년에 세운 것이다. 절벽 아래에는 붉은 글씨로 落花岩이란 글씨를 새겨 놓았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백제고기(百濟古記)에 의하면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어 아래로는 강물에 임하는데, 모든 궁녀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차라리 죽을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고 하고, 서로 이끌고 이곳에 와서 강에 빠져 죽었으므로

 이 바위를 타사암(墮死巖)이라 하였다고 한다.낙화암의 본래 명칭은 타사암이었는데,

 뒷날에 와서 궁녀, 즉 여자를 꽃에 비유하고 이를 미화하여 붙인 이름이 분명하다.

 

 

 

 

 

 

낙화암에서 몸을던진 삼천궁녀를 위로하기 위해 지었다는 고란사

부소산(扶蘇山) 낙화암 아래쪽

백마강변에 위치한 절로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창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백제 때 왕들이 노닐기 위하여 건립한 정자였다는 설과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라는 설이 전하며, 백제의 멸망과 함께 소실된 것을

고려시대에 백제의 후예들이 삼천궁녀를 위로하기 위해서 중창하여

 고란사(高蘭寺)라 하였다. 절 일원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