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건축미를 대표할 만한 국내 제일의 누각 보물 제147호 밀양 영남루

2013. 7. 4. 12:29전국 문화재와 박물관/국가지정 문화재

 

 

 

 

 

 

우리나라 건축미를 대표할 만한 국내 제일의 누각 [밀양 영남루]

보물  제147호  

 

 

 

누(樓)란 건물의 사방을 트고 마루를 높여 지은 집으로 일종에 휴식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 밀양도호부 객사에 속했던 곳으로 손님을 맞거나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고려 공민왕 14년(1365)에 밀양군수 김주(金湊)가 통일신라 때 있었던 영남사라는 절터에

지은 누로, 절 이름을 빌어 영남루라 불렀다. 그 뒤 여러 차례 고치고 전쟁으로 불탄 것을

다시 세웠는데, 지금 건물은 조선 헌종 10년(1844) 밀양부사 이인재가 새로 지은 것이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기둥은 높이가 높고 기둥과 기둥 사이를 넓게 잡아 매우 웅장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며,

건물 서쪽면에서 침류각으로 내려가는 지붕은 높이차를 조정하여 층을 이루고 있는데

그 구성이 특이하다. 또한 건물 안쪽 윗부분에서 용 조각으로 장식한 건축 부재를 볼 수 있고

 천장은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연등천장이다. 밀양강 절벽의 아름다운 경관과

조선시대 후반기 화려하고 뛰어난 건축미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누각이다.
이 건물은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742∼765, 재위)때 이 자리에 세워졌던

 영남사(嶺南寺)가 폐사(廢寺)되고 흔적만 남게 되자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14년(1365)에

당시 밀양군수 김주(金湊)가 신축하여 절 이름을 따서 영남루라 한 것이다.

조선(朝鮮) 세조(世祖) 5년(1459)에 밀양부사 강숙경(姜淑卿)이 규모를 크게 하였고,

중종(中宗) 37년(1542)에 밀양부사 박세후(朴世煦)가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병화(兵火)로 타버렸다. 그 뒤 인조(仁祖) 15년(1637)에 밀양부사 심흥(沈興)이 다시 중건하였고

 헌종 8년(1842)에 실화로 불에 탄 것을 이인재(李寅在)가 밀양부사로 부임하여 현종 10년(1844)

 다시 개창한 것이 현재의 건물이다. 본루는 조선 후반기의 우리나라 건축미를 대표할 만한

국내 제일의 누각이다. 부속건물로는 능파당(陵波堂)과 침류각(枕流閣)의

양익루(兩翼樓)를 비롯하여 사주문(四柱門), 일주문(一柱門), 객사(客舍)인

 천진궁(天鎭宮)이 있으며 뜰에는 유명한 석화(石花)가 깔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