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의 정궁이었던 덕수궁 (중화전 일원)

2011. 4. 26. 11:16전국 문화재와 박물관/국가지정 문화재

 

대한제국의 정궁이었던 덕수궁 (중화전 일원)

 

 

대한제국의 정궁이었던 덕수궁은 원래 성종(9대)의 형인 월산대군의 저택이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타 없어지자 1593년(선조 26)부터 선조의 임시 거처로 사용되다가 광해군이 1611년(광해3)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던 이곳에 ‘경운궁’이라는 정식 궁호를 붙여 주었다. 그 후 광해군은 1615년(광해7) 재건한 창덕궁으로 어가를 옮기고 경운궁은 별궁으로 남게 되었다.

경운궁은 1897년 대한제국 출범과 함께 한국 근대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전성기 때의 경운궁은 현재 넓이의 3배에 달하는 큰 궁궐이었다. 현재의 미국대사관저 건너편 서쪽에는 중명전을 비롯해 황실 생활을 위한 전각들이 있었고, 북쪽에는 역대 임금들을 제사 지내는 선원전이 있었으며, 동쪽에는 하늘에 제사 지내는 환구단을 설치하여 황제국의 위세를 과시했다. 그러나 고종황제가 황위에서 물러나면서 경운궁은 선황제가 거처하는 궁으로 그 위상이 달라졌고 이름도 덕수궁으로 바뀌었다. 이후 궐내각사 일부와 환구단이 철거되었고 이 지역은 대한제국의 상징 공간으로서의 위상을 잃게 되었다.

고종이 승하한 뒤 1920년부터 일제가 선원전과 중명전 일대를 매각하여 궁역이 크게 줄어 들었으며, 1933년에는 많은 전각들을 철거하고 공원으로 조성하여 일반에 공개했다. 이처럼 덕수궁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원형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었으나, 임진왜란과 대한제국의 역사적 격변을 겪은 궁궐로 국난 극복의 상징적 공간이자 그 중심이었다.

덕수궁 홈페이지~http://www.deoksugung.go.kr/

 

 

덕수궁 중화전 및 중화문 [德壽宮 中和殿 ─ 中和門] 

 

 

 

중화문과 중화전 사이에 품계석(品階石)입니다.

품계석이란 조정에 들어서면 법전에 올라가는 계단까지 세 갈래의 길인 삼도가 이어져 있고 그 양옆으로 비석 모양의 돌이 있는데, 이를 품계석이라 합니다. 서울의  궁궐내 법전(정전)인  경복궁의 근정전, 창덕궁의 인정전,창경궁의 명정전, 경운궁의 화전이 있는 곳에 있습니다.

 경운궁에는 중화전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가 대칭인 형상으로 임금님과 문 무관들이 조회를 하시던 장소로서 품계석이 서있는 자리에 문무대신들이 위치해 있었습니다. 왼쪽의 품계석이 문반의 품계석이고 오른쪽에 있는 것이 무반의 품계석입니다. 

 

 

 

 

 

 

공식행사를 치렀던 궁궐의 으뜸전각 중화전(보물 제819호)

 정면 5칸, 측면 4칸, 단층의 다포계(系) 팔작지붕이다.

 1902년(광무 6) 창건 당시에는 2층 건물이었으나

1904년 화재로 소실되고 1906년 단층으로 중건되었다. 

 

 

 

 

 

 원래 중화전 영역 주위에는 장방형으로 2칸 폭의 행랑이 둘러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모두 철거되고, 현재는 동남부 모퉁이의 7칸만 남아 있다.
2중의 넓은 월대 위에 세워진 중화전은 창덕궁 인정전(仁政殿)과 같이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의 다포계 팔작지붕을 하였다. 기단의 둘레는 난간을 두르지 않았으며, 사방에 계단을 설치하였다. 건물은 약간 서쪽으로 방향을 튼 남향을 하였다.
하월대는 지대석 위에 장대석 두 벌대를 쌓고 그 위에 갑석을 얹었으며, 상월대는 장대석 두 벌대로 설치되었다. 상·하월대 상면에는 잘 다듬은 방형 화강석 박석을 깔았으며, 하월대 전면 좌우와 후면에는 각기 계단이 한 벌씩 놓였다. 기단 상부는 전을 깔았고 좌우에는 향로를 놓았다.

 

 

 

 

 

 

 

 

 

 

 

 

 

 

 

내부 중앙 후측 고주 사이에는 어좌가 놓여 있고, 그 뒤에는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를 그린 병풍이 있으며, 그 상부에는 보개(寶蓋) 천장이 마련되었다. 천장은 모두 우물천장인데, 내진(內陣) 천장의 중심부에는 위로 쑥 들어간 감입형 천장을 설치하고, 그 안에 두 마리의 용을 조각하여 왕을 상징하였다. 전·후면 어칸에는 사분합 꽃살문, 어칸 좌우 한 칸과 양측면 남쪽 두 번째 칸에는 삼분합 꽃살문, 나머지 칸에는 모두 삼분합 꽃살창을 설치하였으며, 상부 전체에는 빛살 광창을 설치하였다. 내부 바닥은 전돌을 깔았다.중화전과 중화문은 조선왕조 최후에 지어진 궁궐건축으로 비록 규모가 작고 장식적이지만, 망국의 소용돌이에서 왕궁이 처했던 역사를 생생하게 되살려주는 증거물이다.